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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춘옥의 수필마당-마음의 부엌 아궁이
2021년02월21일 16:18   조회수:299   출처:청도조선족작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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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마음의 부엌 아궁이

한춘옥

 

마음의 부엌 아궁이 

가족의 명줄을 이어주던 부엌 아궁이가 사라진지도 한참 되었다. 바람 먹고 세차게 일어나는 불이 추억으로 다가온다. 바람의 친구인 불은 부엌아궁이에서 너울 너울 춤을 추며 제구실을 잘도 한다. 그 격정적인 불은 부엌아궁이에서 방을 따뜻하게 덮여주고 맛나는 음식도 만들어 주었다.

우리부모님들이 빈주먹으로 두만강을 건너와 그 혹독한 추위에도 살아 남을 수 있은 것도 바로 온돌문화를 고집한 덕분이 아닌가 싶다. 부엌아궁이는 가족사랑을 불태우는 신성한 곳이었다. 

네모난 아궁이에 땔감을 집어 넣고 성냥개비로 불씨를 넣어주면 불이 혀를 날름 거리며 나무를 집어 삼킨다.

엄마는 가마목에서 밥과 요리를 하고 나는 불을 때면서 재미나는 이야기를 많이 도 들었다. 글짜가 없는 우리집 사전인 부엌아궁이에서 나는 많은 것을 체험하고 느끼면서 성장했다.

부지깽이로 바람을 넣어주고 불을 잘 조절하면 맛있는 밥과 구수한 숭늉을 먹을 수 있었다. 철가마에 밥을 할 때면 처음 시작의 불은 좀 크게 나중에 뜸을 드릴 때는 불을 약하게 한다. 불의 강약을 잘 조절하는 것이 바로 부엌아궁의 운전 기술이다.

합격된 부엌 면허증도 가지기 그리 쉽지 않다. 때론 밥을 설구고 때론 까맣게 태우기도 한다. 부엌에 자주 내려가서 공손히 앉아 불을 때는 찻수가 늘어가면 노하 우를 쌓게 되고 경험이 생긴다.

처음 불을 땔 때 엄마는 나에게 주의사항을 일일이 말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 저것 건드려 보면서 장난 치다 보니 엄마의 잔소리를 귀등으로 흘러보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땔감을 많이 넣고 당나귀가 풍차를 돌리 듯이 풍로를 마구 돌려댔다. 그만 불이 재채기하듯이 갑자기 나에게 덮쳤다. 성난 불은 잔인하게도 삽시에 나의 눈섭과 앞머리까지 죄다 먹어버렸다. 다행히도 큰 화상은 입지 않았다. 하지만 눈섶과 속눈섭까지 미끈하게 밀어낸 얼굴 때문에 한동안 곤혹을 치렀다.

부엌아궁의 세례를 톡톡이 받고난 후 부터 나는 불의 잡식성 성질머리를 다소나마 알게 되었다. 포만감을 모르는 불의 양면성을 잘 이용하면 우리에게 덕이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큰 재난이 따른다.

성난 불은 잔인하지만 숯덩이가 눈을 부라릴 때가 그래도 귀엽고 좋았다. 어쩐지 불만 보면 가슴이 따뜻해지고 웃음을 실실 흘렸다. 엄마는 나에게 헬레발이라는 별명까지 달아주었다. 소련빵 헬레발이 얼마나 맛있고 귀한 존재라고 듣는 것 만도 횡재한 셈이다.

저녁이면 감자나 고구마를 재불에 묻어 놓고 한참을 웃고 떠들며 기다린다. 부지깽이로 구운 감자를 파내고 식구들이 모여 앉는다. 나는 검댕이 화장을 하면서 김이 몰몰 나는 구수한 속살을 파서 먹는다. 가족이 오손도손 모여 앉아 호호 불면서 톡톡 터지는 노란 감자를 먹는 재미는 쏠쏠했다. 그리고 풋강냉이를 구워 젓가락에 꿰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그 환상적인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불 같은 성격인 아버지는 언제나 가장이란 신분으로 도도하시다가도 가끔은 올방 자를 풀 때도 있었다. 마른 물고기를 구워서 한잔 쪽 하시면 기분 좋게 아리랑을 한곡 넘기면 가족들이 박수치며 오락을 한판 벌린다. 그 시대 동네 다른 집 아버지들은 술 주정을 많이 부렸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는 늦게 배운 술이라며 한번도 과음하는 것을 보지 못했고 오히려 술 마시면 무척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용돈도 챙기는 술 심부름을 엄청 좋아했다.

아버지는 불은 잡식성이어서 포만감을 모르고 집 한채라도 순식간에 집어 삼키 지만 물 한대야를 얻어 맞으면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고 말씀하셨다.

“불도 물 앞에선 손을 드는 법이야!”라고 하시면서 물 같은 엄마의 고생살이를 이해하시고 인정하셨다. 아버지는 엄마에게“당신은 빛이고 나는 그림자” 라고 하시면서 금혼까지 함께 나란히 걸으셨다. 아마 지금도 천국에서 부엌아궁이에 사랑의 불을 때시고 계실 것이다.

옛날 부엌아궁이는 쓰레기를 처분하는 곳이기도 했다. 집에서 버리는 가연성 생활쓰레기는 부엌아궁이가 담당을 하였다. 쓰레기를 부엌아궁이에 넣으면서 엄마는 마음에 찌꺼기도 같이 버리라고 한다. 불에 타는 쓰레기를 부지깽이로 뚜지면서 “아이구 시원해! 다 가져가!” 하면서 불과 다정하게 말씀하신다. 힘들고 어려웠던 그 시절에는 요즘처럼 그 무슨 “심리상담이요”하는 사치를 누릴수 없었다.                                                   부엌아궁이에 온갖 스트레스를 다 집어넣고 날름거리는 불의 혀에 그냥 맡겨버린다. 불이 재를 낳고 죽어버리면 연기로 날려 보냈다고 믿었다.

부엌아궁이는 나의 실험실이기도 하였다. 화학을 배울 때 부엌아궁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화학적변화라고 원소기호도 그림으로만 보는 엄마에게 신나게 설명을 하였다. 연소의 삼요소에 대해서도 산소와 가연성물질 발화점까지 들먹이며 하루아침에 과학자나 된 것처럼 으쓱해서 침방울을 튕겼다. 제딴에는 많이 배우고 아는 것처럼 허풍을 떨었다.

생활과 일에서 얻은 경험과 지혜로 엄마가 말씀하시면 나도 뒤질세라 껍데기 과학을 들먹거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도 참 해발이 높은 만큼이나 유치했던 일도 많다. 하지만 그런 유치함 속에서도 생활을 사랑하는 법을 익혔다.

요즘은 기계가 가무일을 많이 도맡아 하는 세월이라 인젠 부엌아궁이를 구경하자 해도 쉽지 않다. 그래도 부엌아궁이가 없는 기계온돌방에서 편하게 살고 있어 다행이다. 부모님세대의 아이디어로 오늘 우리가 따뜻한 온돌방에서 살면서 항상 감사한 마음이다. 하지만 오늘의 향수를 누려 보지도 못하고 고생만 하시다 가신 부모님 생각에 가슴이 짠해난다.

집집마다 철판 같은 둔중한 난방철판을 벽에 붙여 놓고 살던 데로부터 점차 우리 민족의 온돌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띠놘(地暖)이 청도에도 보급되어 중국사람들도 엄지를 내들며 인정을 하고 있다. 열발전소의 부엌아궁이로 그 많은 가가호호의 작은 부엌아궁이를 대체했다.

돈이 피보다 진하다는 요즘 세월에 가족과 이웃사랑이 색바래지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다. 우리 부모님세대들의 온돌문화는 사랑을 불 같이 끓이면서 정으로 살아왔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이 가을에 그리움을 보글보글 끓이고 싶다. 가족사랑의 화신이었던 부엌아궁이에서 뿌지직 탁탁톡톡하는 장작나무의 불길을 지켜 보면서 가족과 이웃사랑의 멋과 맛을 즐기고 싶다.

우리 가슴의 부엌아궁이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는 불 같은 뜨거운 사랑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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