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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아가 보고싶어) 편지 남기고… 80년만에 완결된 진주만 러브스토리
2021년06월03일 21:39   조회수:72   출처:이우조아 포스트

가족에게 편지쓰고 8일 뒤 전사한 美해군
‘오클라호마함 프로젝트’로 유해 확인돼 80년만에 귀향길
생존동료 “죽기 직전까지 아내 아이 부르며 신에게 기도”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당신이랑 우리 아기가 점점 더 보고싶어. 다섯달하고도 열 아흐레 남았네? 나처럼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이 또 있을까?”

1941년 11월 29일 진주만에서 임무 수행 중이던 미 해군 소속 군함 USS 오클라호마함에 탑승중이었던 스물 두살의 해군 보일러병 윌리엄 유진 블랜차드가 아내에게 쓴 편지의 일부분이다. 제대 뒤 가족들과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간절함과 설렘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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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로부터 여드레 뒤 오클라호마함은 진주만 공습을 개시한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순식간에 뒤집혀 침몰했다. 블랜차드를 포함한 승조원 429명은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폭침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블랜차드가 보낸 편지는 가족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가 됐다. 그 편지의 발신자가 80년만에 한 줌 유해가 돼 뒤늦게 공식 제대한다. 첨단 감식기법으로 폭침 희생자가 누군지 찾아내고 귀향시키는 작전 ‘USS 오클라호마 프로젝트’를 통해 유해가 수습된 것이다. 블랜차드가 편지에서 그렇게 보고싶어하던 ‘우리 아기’, 올해 여든 살이 넘은 아들 빌이 아버지를 맞는다. 아버지의 마지막 편지를 받았을 때 그는 생후 6개월이었다. 2007년 세상을 떠난 어머니 로라 앤과 함께 세 식구는 시공을 초월해 80년만에 다시 모이게 됐다. 블랜차드의 고향인 조지아주의 최대 일간지 애틀랜타 저널 컨스티튜션이 6년만에 끝나는 ‘USS 오클라호마 프로젝트’ 소식을 전하면서 블랜차드 가족의 사연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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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랜차드는 대공황 시절 고교를 중퇴하고 아버지 대장간 일을 돕다 19세에 해군에 입대해 USS 오클라호마함 보일러병이 됐다. 오클라호마함은 진주만에 오기 앞서 정비를 위해 워싱턴주 브레머턴에 기항했다. 블랜차드는 그곳에서 검은 눈동자를 가진 네 살 연하 소녀 로라 앤 라가사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1940년 6월 17일 둘은 결혼했고 아들 빌이 태어났다. USS 오클라호마함이 사랑의 인연을 맺어준 메신저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의 도화선이 된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침몰하면서 오클라호마함은 커플을 영원히 갈라놓는 이별의 상징이 됐다. 오클라호마함 폭침 당시 구조된 인원은 불과 32명. 배와 함께 가라앉은 429명의 시신은 1944년 6월까지 단계적으로 인양돼 하와이에 있는 공동묘지 두 곳에 묻혔다. 이후 1947년 시신들을 꺼내 하와이 스코필드 미군기지에 있는 신원확인센터로 옮겨졌다. 하지만 오랫동안 바닷물속에 있다가 다시 공동묘지에 매장되는 과정에서 심각하게 훼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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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찾지 못한 유해 더미는 호놀룰루 국립묘지 46개 지점에 나뉘어 묻혔다. 2003년 시험적으로 수습한 한 개의 관에서 실종군인 5명의 신원을 확인하는데 성공하면서 신원감식 작업이 재개가 결정됐다. 나머지 신원 미상 유해를 네브래스카주 오펏 공군기지에 마련된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감식시설로 옮겼다. 이를 1만3000여점으로 분류하고 실종자 유족들로부터 DNA를 제공받아 신원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려보내는 ‘USS 오클라호마 프로젝트’가 2015년 시작됐다. 6년간 338명의 신원이 확인돼 가족 품에 안겼다. 블랜차드도 그 중 한 명이 돼 오는 7일 아들이 사는 노스캐롤라이나 엘리자베스 시티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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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는 재혼 후에도 블랜차드를 잊지 않았다. 200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손주들에게 “너희 할아버지의 검은 머리결을 쓰다듬는걸 좋아했단다”며 추억을 회고했다. 오클라호마함에서 온 손편지를 차곡차곡 담아 초콜렛 상자에 보관했고, 집 한켠에 블랜차드의 사진과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직접 서명한 전사통보서를 액자에 담아 걸어놓았다. 손편지에는 “자기야. 난 당신이랑 우리 아기랑 언제까지나 함께 지내고 싶어. 우리 함께 늙어가면서 꼬맹이 쑥쑥 자라는 거 같이 보고 싶다” “바깥에서 일하면서 가족들이랑 한 집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운좋은지 몰라” 처럼 새신랑·초보아빠의 솔직담백한 감정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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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오클라호마가 조각된 재떨이와 등대 모양의 램프도 고이 간직했다. USS 오클라호마 희생자 추모 모임에도 꾸준히 참석했다. 1987년 앤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발신인은 35명의 오클라호마함 생존자 중 한 명인 제임스 솔. 편지에서 솔은 블랜차드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자세하게 들려줬다. 아홉발 어뢰를 맞아 갈갈이 찢겨나간 군함은 뒤집혀 가라앉으면서 10여명의 승조원들이 갇혔고, 물이 급격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블랜차드는 반복해서 기도했다. “내가 없으면 우리 아내랑 아이는 어떻게 될까. 하나님 그들을 살펴주시옵소서.” 솔은 네 번의 시도끝에 가까스로 창문을 통해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블랜차드는 끝내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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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은 끈질기게 미 정치권에 “숨진 동료들을 가족들에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런 요구가 감식기술의 발전과 맞물리면서 2015년 감식작업이 재개됐고, 6년간 338명이 집을 찾아갔다. 오는 7일(현지 시각) ‘USS 오클라호마 프로젝트’ 작전의 종료를 알리는 행사가 유해감식실험실이 있는 네브래스카주 오펏 공군기지와 하와이주 스코필드 해군기지에서 열린다. 최후의 순간까지 신원확인에 실패한 유해들을 다시 해군으로 ‘원대복귀’시키는 행사다. 가족들과의 해후를 끝내 하지 못한 이 유해들은 진주만 공습 80주기인 오는 12월 하와이 호놀룰루 국립묘지에 재안장될 예정이다.

[정지섭 기자 xanadu@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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