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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해의 수필-고모부
2020년06월18일 14:03   조회수:698   출처:청도조선족작가협회
수필

고모부

윤명해


고모부

 

  나는 아직도 모른다. 대학졸업생인 우리 고모부가 왜 소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우리 고모에게 장가갔는지를.  1950년대였으니 가능한 일이였을가?

  고모부는 조선사람치고는 꽤 큰 176센치의 키에 누가 봐도 미남이라고 손꼽을 인물, 그리고 그 당시 중국에서 유일한 지질학교인 장춘지질학원을 졸업했었다.

  건국한 지 10년도 되지 않은 나젊은 중화인민공화국은 각 방면의 인재가 시급히 요구했다. 그래서 채 졸업을 하지 않은 재교생 중에서 훌륭한 인재를 뽑아 지질탐사에 내보냈다고 한다. 그것도 주은래 총리의 지시로. 뽑힌 몇명 안되는 수재 중에 우리 고모부가 있었고 처음으로 배치를 받은 사업단위에 중국의 저명한 지질학자인 리사광이 있었다. 이 정도면 그 시대 사람치곤 경력이 화려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모는 다섯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님(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등에 업혀 한국 충남 공주시 근처의 시골인 고향을 떠나 만주에 이주를 했다고 한다.

  아래로 륙속 태여나는 동생들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했다고 한다. 시집 갈 나이가 되여 중매군의 중매로 우리 동네와 7킬로 정도 떨어진 이웃동네의 총각한테 시집을 갔는 데 그 총각이 우에서 말한 우리 고모부였다. 처녀총각으로 만나 일생을 큰 풍파없이 백년해로를 했으니 이 결혼은 고모한테는 분에 넘치는 행복이였으리라.

  아버지를 닮아 156센치의 작달막한 키를 가진 고모였지만 자랑할만한게 하나도 없는 건 아니다. 고모의 처녀시절의 옛날 사진을 본 적이 있는 데 지금의 심미표준으로 봐도 참으로 이쁘다. 숫총각의 마음을 사로잡기엔 충분한 얼굴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녀자가 남편감을 고를 땐 여러가지를 보지만 남자가 안해감을 고를 땐 얼굴부터 본다고 아무리 대학졸업생인 고모부도 이쁜 녀자를 좋아하는 남자의 본능은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에서 맏아들인 고모부는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장자의 책임도 있으니 야들야들하고 연약한 도시처녀보다 지식은 없지만 곁에서 부모님을 보살피고 모실 수 있는 억세고 강한 농촌처녀가더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고모와 고모부의 신혼생활은 시골농촌에서가 아닌 북경에서 시작이 되였다. 북경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하북성 보정시로, 강소성의 진강시로, 호남성의 무한시로 이렇게쭉 이어졌다. 지질탐사대의 사업 특점상 한곳에 쭉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모네는 자주 이사를 해야 했다. 그 사이에 슬하에 딸 둘, 아들 둘 이렇게 자식 4남매를 두셨다.

  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고모네집에 놀러 갔을 때 고모의 막내아들이 초중 2학년에 다니고 있었고 고모네집은 관내의 어느 큰 도시가 아니라 동북 길림성의  작은 진에서 살고 있었다.

 가문의 장손인 나를 출세시키려면 시골에서 공부해서는 안된다고 무조건 시내학교에 가 공부를 해야 된다는 것이 우리 할머니의 신조였고 생전에 이 중대한 임무를 우리 가문의 유일한 도시사람인 고모부에게 부탁을 했다고 한다. 고모부는 장모와의 생전 약속을 지켰고 내가 일곱살이 되자 나를 자기집에 데려오게 한 것이다.

  우로 딸을 넷이나 낳고 막내로 아들을 보게 된 우리 엄마는 나를 고모네집에 보내놓고 석달이나 울었다고 한다. 아무튼 나는 할머니의 유언 덕에 시내에 있는 고모네 집에서 생활을 시작했고 그것이 8년이나 이어질지는 나자신도 몰랐다.

  고모부는 지식분자치고는 손재주가 참 많으셨다. 걸상이나 의자는 물론  쏘파 같은 것도 쉽고 만드셨고 책장, 이불장도 손수 만드셨다. 철근을 용접해 닭똥은 밑으로 떨어지고 닭알만 두르르 굴러나오는 참으로 신기한 3층짜리 닭장도 만드셨다.

  구불구불한 철근을 하나하나씩 두드려 곧게 펴는 일은 내가 자진해서 맡았고 하학만 하면 철근 두드리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물론 고모부의 대견해하는 눈빛과 칭찬에 아픈 손을 주무르며 참아낸 것도 사실이긴 하다.

  엽초를 말아 피우던 때라 피울 적마다 한대씩 마는 것이 아마 귀찮았을 것이다. 고모부가 발명한 "엽초 마는 기계"의 원리를 아직도 나는 잘 모른다.

  하여튼 실담배를 골고루 이미 장착된 담배지에 놓고 기계의 손잡이를 한번 당겼다가 밀면 담배가 권연이 되여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집에 놀러온 친척이나 손님들은 누구나 그 기계를 놓고 감탄을 금치 못했고 그럴 적마다 으쓱해하시던 고모부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삼삼하다.

  그 시절의 "자가용"- 두바퀴 자전거를 고모부는 혼자서 수리하셨는 데 아마 자재만 있었으면 자전거를 한대 조립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한창 자전거를 배울 나이라 자전거가 집에 놀고 있으면 몰래 끌고 나간다.

  그리고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씽씽 자전거 달리기 시합을 한다. 솜씨가 서툴러서 자주 넘어져 자전거에 온통 "상처"를 입히지만 모르는척 몰래 원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그러나 고모부가 한번만 타보시면 내가 자전거를 다쳤구나 인츰 아신다.

  그리고는 꾸중하신다. 자전거가 아까와서 그러는 게 아니라 내가 다칠가봐 그런다고… 소학교 고급학년쯤에 나는 그 자전거를 타고 먼 심부름도 잘 다녀왔고 딴 시내에서 공부하는 고모네 막내형의 하교 마중도 내가 도맡게 되였다.

  고모부는 나의 학업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 시절 학교에서 주문하라는 신문잡지는 다 주문해주셨고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고 일깨워주셨다. 소학시절 나는 공부는 그럭저럭 했지만 숙제를 잘 하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 버릇을 떼게 하려고 고모부는 담배지 한뭉치를 나에게 주면서 매일 숙제내용을 담임선생님더러 거기다 적게 하고 숙제를 다한 후에는 자신이 검사하신 후  거기다 친히 사인해 주시면서 그 "쪽지"를 이튿날 담임선생님께 바치게 하였다. 그것이 고모부가 고안해낸 방법이였고 그 덕분에 나는 그 후로 다시는 숙제를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같이 어렵게 살던 세월이라 정식 직장이 없는 고모는 가정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어느 중학교 숙사에서  불도 땐 적 있었고 어느 작은 식품공장에서 일 한적도 있었다. 얼음과자공장에 출근한 적도 있었는 데 그 덕에 얼음과자를 이 시리도록 실컷 먹었던 기억도 있다. 봄에는 온갖 나물을 뜯으러 다녔고 민들레를 캐서 말리웠다. 여름에는고구마넝쭐을 따러 다녔고 가을에는 이삭주이를 많이 다녔는 데 콩, 옥수수, 감자 등 별의별게 다 있었다.

  말린 민들레와 고구마넝쭐, 이삭으로 주어온 새끼감자를 넣어서 만든 장졸임은 온겨울 밥상의 주요 반찬이였다. 이삭 주이나 나물 뜯으러 나설 때면 혼자 가기 무섭다면서 나를 자주 데리고 갔는 데 고모는 이삭을 줏고 나는 들판을 쏘다니고, 이것이 나의 동년시절의 한 풍경이였다.

  가방끈이 짧은 고모였지만 독학으로 중국글을 뗏는 데 신문잡지는 물론 소설까지 읽을 수 있는 수준이였다. 일이 없어 집에 있을 때면 고모는 소설 읽기를 좋아했다. 고모가 읽는 소설책을 나도 짬짬이 훔쳐 읽었고 어쩌다가 혼자서 집 지키는 날이면 나는 온종일 책만 읽었다. 아마 그 때부터 독서를 좋아한 거 같다. 책을 좀 읽은 덕분에 학급에서 나는 이야기군이였고 내 주위엔 언제나 내 이야기를 듣으려고 친구들이 모여들군 했다.

  솜씨 좋은 고모부는 한달에 한번 정도 바리깡으로 내 머리를 깎아주셨기에 나는 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리발관을 가본 적이 없었다. 몇달에 한번씩 자기 무릎에 나를 눕게 하고는 귀지도 파주고 고모는 내가 아홉살 때까지 내 머리를 감아주었다. 워낙 거센 성격에 성질이 급한 고모는 물이 뜨겁다고 아프다고 엄살을 떠는 나를 무시하면서 말이다.

  내가 중학교 3학년에 진급할 때 고모네 집은 고모부의 전근으로 장춘으로 이사를 했고 나는 그 때 처음으로 학교 기숙사에 이불짐을 풀었다. 고모네가 이사를 떠난 시내는 나한테는 익숙한 타향이 되버렸다. 가끔 쉬는 날에 고모네가 살던 옛집에 가보군 한다. 물론 벌써 딴 사람이 이사들어왔지만 나한테는 너무나 익숙한 남의 집이였다.

  파란 뼁끼칠한 대문이며 고모부가 한장한장 쌓아올린 창고의 붉은 담벽이며 멀리서 보면 2층 베란다의 포도넝쿨도 여전히 푸르청청하다. 그러나 그 집엔 고모네가 없다.  그 파란대문 틈사이로 안을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인기척이 들리면 도적처럼 도망쳐 골목어구에서 눈물 방울을 흘리기도 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그 시내를 떠난 지가 26년이 흘렀고 나도 불혹의 나이에 들어섰다. 학교문을 나서고 출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내 딸년이 지금 11살이다. 부모가 되고 자식을 키우면서 새삼스럽게 고모부와 고모가 자꾸 그리워진다.

  내 자식도 말을 듣지 않거나 말썽을 피우면 목소리가 높아지고 손부터 올라가는 데 하물며 남 자식을 키우기는 얼마나 힘들었으랴! 내 자식이라면 때리고 욕해도 별탈이 없지만 남의 자식은 너무 심하게 다그쳐도 안되고 너무 풀어놓아도 안된다. 그런 세월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8년이나 길었으니…

  엄마와 많이 닮은 이모네집이 우리 고모네집과는 5리 정도 떨어진 농촌에 있었다. 엄마가 사무치게 보고 싶던 하루, 고모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하교길에  기차길을 따라 둬시간이나 걸어서 나는 무작정 이모네집으로 갔다.

  집집마다 전화가 없던 세월이라 아이가 잃어버렸다며 온 시가지를 찾아 헤매던 고모부가 이모네집까지 찾아온 것은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였다. 그런 고모부에게 이불 속에 누워서 미안한 웃음만 짓던 철부지 나, 지금의 나는 안다. 남의 집 자식을 데려가 키웠는 데 애가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두려웠고 얼마나 상심했고 얼마나 걱정했는가를…

  내 성격 같았으면 래일 당장 집으로 내쫓았을 것인데 고모부는 한번도 나에게 집에 가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런 고모부가 몇년 전에 이 세상을 하직했고 나는 그 때 먹고 살기가 바빠서  고모부의 마지막 길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고모부를 떠나보낸 고모도 치매기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다. 고모도 고모부를 만나러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나보다. 너무 슬픈 현실이다.

  할머니의 소원대로 나는 시내학교에서 공부를 했지만 할머니가 바라던 만큼 출세하지는 못했다. 그냥 내 정직한 두손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면서 세상을 평범하게 살아갈 뿐이다. 평범한 일생이지만 나에게는 남보다 평범하지 않는 고모부가 있다. 고모부와 고모는 나에게 그냥 친척이 아니라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특히 고모부는 그 넓은 아량과 따뜻한 사랑으로 나의 동년을 지켜주셨고 내 인생의 본보기가 되셨다.

  이 글을 적으면서도 나는 고모부가 못견디게 그립다.

  아 고모부! 고모부는 그곳에서 잘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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