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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  좋은 글  >  김연의 수필-시아버지의 유산
김연의 수필-시아버지의 유산
2021년05월12일 15:18   조회수:689   출처:청도조선족작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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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시아버지의 유산

김연

  


시아버지의 유산

 

며느리가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건 가식인가?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아버님이 돌아가신 9년동안 아버님 생각에 눈가를 적신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아버님은 훤칠한 키에 등이 조금 굽어졌고 신사의 품격을 가지신 분이다. 평소 말씀이 적지만 기분 좋은 날엔 빙그레 웃으면서 옛날 일들을 흥미진진하게 얘기하기 좋아하셨다. 귀에 굳은살 박힐 정도로 들어온 가족들은 하나 둘씩 자리를 뜬다. 타향에서 일하다 어쩌다 고향에 가는 막내 며느리인 나만이 늘 마직막 청중이다. 아버님이 했던 이야기들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지만 그의 행복했던 미소는 아직도 내 가슴에 자리 잡고 있다.

집에 전화를 하면 자녀들이며 손주들도 아버님과는 몇마디 안부만 전하고는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님은 늘 여기저기 아프다 해서 온 가족의 관심은 어머니한테만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전화를 하면 아버님은 늘 똑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토 하나 바꾸지 않고 똑같은 말을 11년 동안.

 “며느리요? 우리 걱정 마오. 잘 있소. 사돈이랑 사돈댁이랑 사돈처녀도 다 무사하지야? 나는 아픈데 하나도 없소. 나는 야, 그냥 며느리랑 아들이랑 건강하고 하는 일 잘 되면 되오. 바라는게 없소.”

 아버님은 젊었을 때 아주 멋쟁이였다. 좋은 때를 만났더라면 영화배우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는 심양에 살면서 타이어 공장에 출근하셨다. 어느해 휴가 때 고향에 놀러 왔다 아릿다운 어머니한테 한 눈에 반하여 그의 인생이 변하였다. 남색 중산복을 입고 하아얀 장갑을 끼고 들에서 꺽어온 꽃다발을 어머니한테 선물하며 구애하였다. 농사일도 못할 저런 보기만 멀정한 놈한테 딸을 못 준다며 외할아버지가 반대했지만 두 사람은 결국 백년해로를 언약하고 아들 셋과 딸 하나를 양육하였다.  남편은 큰아주버님과는 16년, 둘째 아주버님과12년, 시누이와는 8년차 되는 막내로 태여났다. 그것도 어머니가 절육수술을 하고 아버님 년세 마흔에 얻은 늦둥이였다.  

아버님은 난생 처음 하는 농사일이지만 열심히 배우면서 애 쓰셨다. 새벽 서너시면 일어나서 어머니를 도와 아궁에 불을 피웠다. 마을 사람들은 아버님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아버님은 한평생 정직하게 사셨다. 마을에서 지서로 일하면서도 직권을 리용하거나 공가의 것을 거져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외할머니가 혈류병으로 여러 해 앓았는데 아버님이 수래로 향 병원에 모셔 다녔고 외삼촌이 두분 있었지만 맏사위인 아버님이 외가집 옆에 살면서 효도하셨다.

아버님은 큰 아들 둘한테는 분가할 때 초가집 한채에 황소 한마리씩 장만해 주었는데 막내인 우리한테는 결혼식도 못 차려 주고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며 늘 미안해 하셨다. 남편이 대학 졸업할 때 아버님이 년세 예순이 넘었지만 농사일을 하면서 학비를 마련하셨다. 남한테 빚지지 않는 것이 시부모님의 신념이였기에 그러다 보니 한평생 농사일만 아득바득 하셨다.

남편이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자마자 달달이 부모님한테 생활비를 보내 드렸다. 나랑 련애하면서 집에 전화기도 놓아 드리고 흑백 테레비전을 칼라 테리비전으로 바꾸어 드려 시부모님은 나를 복덩이로 생각하고 많이 이뻐해 주셨다. 농사를 그만 두고 목단강 시내에 있는 둘째 아주버님 집에 가셔서 그때 소학교 다니는 손녀딸을 맡아 몇년 돌보셨다.

시골 집이 몇년 비여있게 되니 아버님은 그 집을 팔기로 결심하셨다. 비록 오막살이지만 삼십년 가까이 살아온 정이 묻어 팔기가 아쉬웠을 턴데 막내인 우리에게 시내에서 집은 못 사줄 망정 집 판 돈을 우리한테 주려고 하신 결정이였다. 1000원, 너무나 싼 값에 팔아 아깝기도 했지만 추억을 더듬을 집이 남의 손에 넘겨져 너무 아쉬웠다. 근데 그 1000원마저도 시내로 오는 버스에서 도둑 맞았다. 도둑들이 버스에서 내려서야 승객들이 아버님한테 알렸다. 그때 년세 일흔에 가까운 아버님이 안들 봉변이나 더 당할가봐 뒤늦게야 알리며 따라 쫓지 말라고 말렸다. 이 일로 아버님은 일주일 앓아 누우셨고 두고 두고 어머니한테 나무람 들었다. 젊으셨을 때 종자 돼지 사러 가는 길에 어머니한테 금반지를 사서 선물하고 좋은 돼지새끼를 사지 못해서 어머니한테 한소리 들었었다. 후에 금반지가 색이 날아 뒤 늦게야 사기 당한 걸 알았으니 아버님이 한참 기를 피지 못했을 것 같다.

구정에 설 쉬러 가면 아버님은 며느리들에게 술 한잔씩 권하셨다. 못하는 술이지만 아버님의 사랑과 축복이 담겨 있는 술이라 반가이 받아 마셨다. 해년마다 같은 말을 하셔도 지겹지 않다. 그런 아버님의 소박한 사랑이 그립다.

아버님은 불도 키지 않고 문어구에 어두커니 앉아 식구들의 구두를 하나하나 반짝반짝 빛날 때까지 닦으시고 흐뭇해 하셨다. 신발이 반짝여야 앞길이 창창하다며.

남편이 중화 담배를 사드려도 아까워 피우지 않고 아버님은 손수 초담배를 말아 피우셨다. 한번은 어머니의 성화에 담배를 끊기로 결심하셨다. 3주 넘게 잘 참으셨다 했는데 하루는 어머니랑 같이 장에 나가시던 아버님을 아무리 기다려도 따라 오지 않아 또 다리가 아파서 어디에 앉아 쉬나 보다 생각하고 아버님을 찾으러 돌아섰다. 그런데 왠걸 아버님이 담벽 밑에 쭈쿠리고 초담배를 뻑뻑 빨고 있었단다. 뒷일은 생각하도 뻔하다.

아버님은 술을 좋아하지만 과음하진 않으셨다. 저녁 식사 때 빼주 석냥을 한목에 혹은 두 목에 목구멍에 던져 넣으셨다. 이 기술도 유독 4형제 중 남편이 물려 받았다. 빼주는 잘 마시지 못하지만 입을 크게 벌리고 맥주를 한잔씩 쏟아 붓는데 눈 깜짝 할 사이에 삼켜 버린다.

아버님은 축구를 잘 찼었다. 쉰이 넘어서도 현대에 나가 축구를 찼었는데 “내거!”하며 소리는 크게 질렀지만 헛발을 자주 하셨다. 남편이 중학교 때부터 축구에 소질이 있는 걸 발견하고 몹시 기뻐하셨다. 그 때는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전문학교에 보내거나 이 재간을 전문직으로 발전시켜줄 엄두도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이 또한 남편에게 가장 큰 아쉼움이다.

우리가 혼인신고를 할 때 친정엄마랑 친척들은 한국에 계시고 시댁식구들은 중국에 계시는데 지금처럼 비자가 쉽게 나와 래왕할 수 있을 때가 아니여서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남편 사업이 잘 나갈 때 결혼식을 올리려 계획 잡았다가 어머니가 그해는 과부해여서 결혼식 하면 안된다 해서 또 못했다. 몇년이 지나 아버님 년세도 여든이 가까우니 더 지채하면 안될 것 같아 우리는 다시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시부모님은 한국에 우리 결혼식 참가하러 가시려고 려권을 만들고 비자를 준비하셨다. 호구가 시골에 있어서 향에 증명을 띠러 가야 했고 여간 쉬운 일이 아니였다.

 둬번 버스를 타고 시내와 향을 헤매고 나서 아버님은 앓아 누우셨다. 그러던 어느날 베란다에서 갑자기 넘어져서 입원하게 되였다. 젊었을 때 수래에서 떨어져서 허리와 다리를 상하여 그 후유증으로 늘 힘들어 하셨다. 이번에도 다리가 아프셔서 넘어지셨나 했는데 결과는 충격적이였다. 암세포가 머리와 폐, 방광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자녀들이 청도에서 북경에서 한국에서 고향으로 급속히 돌아갔다.

폐암으로 진단받아서 어머니는 애한테 전염될가봐 절대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폐암은 전염되지 않음을 확인하고 나는 남편이 고향에 돌아간 며칠 후에 3살 되는 딸애와 같이 기차에 몸을 담았다. 암세포가 대뇌에까지 전의되여 아버님은 종종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셨다. 자녀들도 손주 손녀도. 그래도 어머니는 항상 알아보셨다. 다만 가끔은 몇십년전의 추억 속에 머물러 있다 가끔은 현실 속이였다 헷갈리셨다.

병원에서는 너무 늦었다며 퇴원을 권장했다. 아버님 인생의 마지막 길을 나는 딸애와 어머니와 기도로 함께 하였다. 아버님이 정신이 좀 들어 보일 때 어머니가 말하셨다.

령감, 손녀 왔소. 막내 손녀 왔소. 돈 줘야지.”

아버님은 손을 힘 없이 흔들며 베개 밑을 가르켰다. 어머니가 베개 밑에서 지갑을 꺼내 아버님께 드렸다. 아버님은 창백한 손으로 지갑을 열고 100원짜리 지폐와 10원짜리 20원짜리 5원짜리를 뽑아 이리저리 보시더니 100원짜리를 지갑에 넣고 작은 지폐들을 아이에게 주었다.

령감도! 큰 돈을 줘야지 몇십원 밖에 안 줘요? ” 라며 어머니가 나무라셨다.

아버님은 하루에 한두번 쯤은 지갑을 열고 100원짜리 지폐를 한장 뽑아 두손으로 얼굴 우에 들고 휑하니 한참을 보다 뒤집어서 보고 여러번 반복하시다 다시 지갑에 넣어 베개 밑에 쑤셔 넣으셨다.

아버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가? 왜 돈을 유심히 바라 보았을가? 자녀들이 살림이 좀 풀리기 시작해서 생활비를 넉넉히 드리는데도 아껴 써온 습관에 얼음과자 하나도 사 드시기 아까워하셨고 어머니가 시내 이사 와서 돈 씀씀이가 커지니 “노친이 변했다”고 하소연하던 아버님이였다.

지폐 100원은 단지 100원의 가치가 아니였을 것이다. 류통 중인 인민폐 중에 가장 큰 액수여서 아버님에게 위로와 안심이 않이였을가 생각해 본다. 무덤에도 가져 갈 수 없는 돈을 위해 한평생 고생해온 참회일가? 못 이룬 아버님의 꿈이 담겨 있을가?

아버님은 암진단을 받은지 보름만에 돌아가셨다. 평생 절약해 오신 것처럼 큰 치료비도 써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이 또한 남편의 원한이다. 돈 버느라 우리의 작은 가정을 돌보느라 부모님과 같이 한 시간이 너무 적어 미안과 후회 뿐이다.

아버님이 돌아 가시자 둘째 아주버님은 아버님의 유물들들 다 내다 태웠다. 값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려 줄 집도 재산도 돈도 없었다. 형제들이 유산을 위하여 다툴 일이 없어서 다행인가 싶다. 한 사람이 죽으면 정말 바람처럼 사라지구나, 남은 사람은 어떻게든 잘 살아가겠지만 간 사람만 불쌍하다는 말의 뜻을 알 것 같다. 나는 아버님이 쓰시던 작은 나무 바구니 하나를 유물로 남겼다. 검붉은 뺑기 색이 낡아 보잘 것 없지만 아버님을 련상케 하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다. 지금도 소금 찜질 할 때 받침대로 쓰기도 하고 마늘을 담아 두기도 하며 잘 활용하고 있다.

나는 아버님 지갑에 들어있던 몇백원이 남겨준 교훈과  낡은 나무그릇이 아버님의  유산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나이 들면서 아버님을 점점 닮아가는 남편을 보며 아버님의 유산은 그가 살아온 삶 자채라는 걸 깨달았다.

한평생 안해를 위하여 살아온 아버님에겐 꿈이 없었을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공인직을 버리고 산골짜기의 작은 마을에서 평범하게 일생을 보내셨다. 어머니의 잔소리에 아버님은 허허 웃고 지나셨다. 많이 화가 날 때는 “에이!”하고는 집을 나가 산에 돌아다니시다가 화가 풀린 후 집에 들어와서 부부간에 소리치고 싸워 본 적이 없었다. 남편도 이런 점을 유전했나 보다. 내가 화나 있으면 피해 나간다. 그럴수록 나는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정면 충돌을 막는 지혜로운 방법이다고 인정하기로 했다.    

남편과아주버님은 아버님의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가정적인 우점들을 물려 받은 같아 감사하다. 우락부락해 보이는 남편이 설걷이랑 빨래를 한다면 친구들은 믿지 않는다. 바쁠 때는 같이 가정일을 도맡아 주고 애들을 학교 데려다 주고 데려 오고 일요일은 아이들과 함께 하려고 다른 일정들을 잡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방학에는 가족여행을 떠나고 여러모로 가정적인 남편이 처가에서도 점수가 높다. 남편의 이런 장점들이 아버님께서 물려주신 귀한 유산이라 생각한다.

  남편은 가끔 아버님 생각에 쓸쓸하다고 한다. 그런 날이면 나도 같이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에 빠진다. 말수 적으시지만 늘 따뜻하셨던 아버님의 사랑이 그립다. 아버님의 유산에 감사하며 평범하지만 오붓하게 잘 살리라 아버님과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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