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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동호의 그 옛날 그 이야기-어망으로 고기잡이 명수로 불리웠던 시절
2021년03월15일 16:55   조회수:328   출처:청도조선족작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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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망으로 고기잡이 명수로 불리웠던 시절

림동호

 

어망(鱼网)으로 고기잡이 명수로 불리웠던 시절


60년대 초부터 80년대 초까지 마을마다 몇 집만의 물고기의 발터가 있었다. 한번 물고기의 발터 자리를 정해 놓으면 영원히 그 집 발터가 되었다. 마을에서는 마치 나라에서 분배한 자류지(自留地)마냥 여기는 누구네 발터요 저기는 누구네 발터요 라고 했다. 이렇게 한번 발터를 정해 놓으면 대대손손 내려오면서 지키었다. 한번 정해 놓은 발터는 세를 주거나 양도하는 일이 절대 없었다. 다른 동네로 이사 할 땐 고기 발터까지 넘겨 주었다. 그 무서웠던 계급투쟁 고봉 시기에도 들판에 호박 몇 포기 심었다가 들통이 나면 자본주의 꼬리라며 사원들을 동원해 낫으로 쳐 버렸지만 고기 발터는 예외였다.

해마다 8월 초부터 지정된 호들에서 지정된 곳에 고기발을 놓은 다음 보초막 까지 지어 놓고 많은 물고기들을 잡아 들였다. 날씨 관계로 제때에 처리 못 하면 끓여서 돼지에게 먹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기 발터가 없는 집들에서는 그런 집들에 가서 돈 주고 사서 먹거나 말렸다. 어머니는 항상 남자가 있는 집에서 돈 주고 물고기를 사다 먹는다는 게 말이 되냐면서 남들처럼 손발이 없냐며 가벼운 한숨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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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루 나는 나도 발터 하나 물색해 보려고 퇴근하기 바쁘게 낫과 삽을 들고 집문을 나섰다 보동(大坝)이나 퇴수 호들 찾아다녔지만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했다. 발터 하나 자리 잡힌 곳에 100미터 200미터 이내 새발터를 못 만들게 했다. 이건 고기 발터 있는 집들에서 내놓은 엄격한 제도였다. 저녁 편까지 힘들게 다녔지만 헛물만 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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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새 어떻게 하면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까? 한가지 생각으로 실면 까지 했다. 이튿날 나는 말미를 맡고 현성에 가서 모기장 80미터를 사 왔다. 한 미터에 20전이라 큰돈도 들지 않았다. 사 온 모기장을 형수님께 부탁해서 재봉침으로 내가 구상 한대로 고기잡이 도구 어망(鱼网)을 만들었다. 총 길이 15미터 그 반두 속에 앞에는 직경이 50cm 되는 밑굽 없는 주머니 하나 만들어 놓고 주머니 뒤 끝부분은 직경이 40cm 정도로 축소해 안으로 들어간 고기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다. 반두의 제일 뒤 꽁무니에는 끈으로 매고 풀게끔 했다. 걸린 고기를 털어 내는데 편리를 위해서였다.

얼핏 보기에는 어모(鱼猫)와 비슷하지만 양옆에 물속에만 들어가면 너불너불 춤을 추어 고기를 망구(网口) 로 몰고 갈 수 있는 넓은 날개가 있었다. 어망은 웬만한 보동이나 강을 가로질러 막을 수 있는 넓이였다. 반두채는 쇠꼬쟁이로 만들어 아무 곳에나 박을 수 있게 했다. 한 반두에 몇십 근의 고기도 아니 백여 근의 고기도 담길 수 있게 했다. 똑같은 모양으로 두 개를 만들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나의 완벽한 작품이었다.

농호들에서 가을을 위해 논물을 뽑을 무렵 저녁에 나는 고기 잡는 어망을 들고 낮에 보아 두었던 곳으로 향했다. 보동 양옆 실버들 나무들이 엉켜진 곳에 어망을 안치했는데 겉으로는 누구도 보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보초도 설 필요도 없었다. 이튿날 새벽 손밀차(手推车)에 비료 포대 몇 개 싣고 떠났다. 예감이 좋았다. 내가 예측했던 것처럼 두 곳에서 미꾸라지를 비롯해 두 포대 넘게 잡혔다. 150근은 잘될 상 싶었다.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고기를 건져낸 뒤 또 면밀이 잘해 놓으니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래서 고기발을 놓은 집에서는 고기가 안 걸린다며 야단이었다.

내가 어떤 수단으로 고기를 잡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그들은 내가 50미터 앞에서 보도랑을 가로질러 막고 잡은 고기인 줄 몰랐다. 미리 연락해 놓은 현성의 물고기 도매 장사꾼들은 매일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찬 바람 불기 시작하면 강으로 가서 물고기를 잡는데 가관이었다. 강을 순찰한 다음 제일 좁고 물이 집중된 곳에 반두를 고정시켜 놓고 약 50미터 사이 두고 모기장 밑 부분에 쇠사슬을 달아 놓은 다음 위서부터 아래로 모기장을 끌고 내려가면 되는데 전부 하현 고기들만 걸려들어 나의 기분을 돋구어 주었다. 이렇게 늦가을 까지 계속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잡은 고기들은 도매 장사들께 넘기고 나머지 말린 고기들은 먼 곳 친척들께 우편으로 보내 주었고 또 나머지는 농산물 시장에 내다 팔아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이렇게 몇 년 지속되었다. 이렇게 되어 마을에서 물고기 잡는 왕이란 칭호도 수여받을 수 있었다.

발터가 있다고 큰소리치던 사람들 마을에서 고기를 잘 잡는다던 사람들이 내 앞에선 모두가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뭐든지 ‘하면 된다’는 명언을 실감케 했다.

80년대 중반부터 힌족들이 나의 어망을 모방해서 고기를 잡았고 또 농약으로 고기를 잡고 또 발전기(发电机)로 고기 잡아 물고기들이 멸종 위기에 놓이자 나는 물고기잡이에서 손을 접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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