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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  좋은 글  >  정순금의 수필-채송화언니
정순금의 수필-채송화언니
2021년01월13일 15:38   조회수:203   출처:청도조선족작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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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채송화언니

정순금

 

 

채송화언니

 

아침밥을 짓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한국에 있는 언니의 큰딸이 걸어온 전화였다. 나는 가슴이 덜컥했다 .

(언니의 병이 더 위중해졌나?)

질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모, 엄마가 7일 동안 혼미상태에 처해있어요. 의식이란 조금도 없어요, 의사도 더 이상 치료할 방법이 없대요”

순간 나는 목이 꺽 막히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흐느껴 우는 질녀에게 몇마디 위안의 말도 제대로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1년 남짓이 인천 료양병원에 입원하여 병마와 싸우던 언니도 이제는 지친 모양이다.

나는 창턱을 바라보았다. 언니의 혼이 담긴 창턱에 놓인 채송화가 요즘 고열에 시들었는지 축 처져있었다. 이 시각 언니가 절절이 그리워났다 .

언니는 18년 전에 태를 묻고 동년시절을 보낸 한국 경남 하동으로 찾아가 호적을 올리고 살았다. 그곳은 조상들의 뼈가 묻어있고 부모님의 혼이 날아가 깃을 내린 고향이다.

언니는 3년 전에 동생이 보고 싶다고 우리집에 오셨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에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애기채송화 두 포기를 얻어왔다. 이튿날에 비닐주머니를 찾아들고 산에 올라가 부식토까지 파와서 손수 화분통에 심어놓았다.

화사하기로 유명한 꽃들이 많고도 많은데 하필이면 시골티 나는 채송화를 심느냐고 내가 의아쩍어 물으니 언니는 줄기와 가지를 수없이 쳐서 화단을 곱게 장식하고 세개 계절을 줄기차게 번식하는 그 모습이 장해 채송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어 언니는 의미심장한 말씀 한마디 더 보탰다 .

  “우리의 아름다운 말, 배우기 쉬운 우리 글을 작가들이 채송화처럼 이 땅에 전파해야 하잖아”

페부에 와닿는 언니의 말을 나는 가슴에 옹이 맺힌 듯이 새겨두었다.

내가 지금까지 시종 필을 놓지 않고 글을 쓰게 된 것도 모두 언니의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

운명이 기구한 언니는 14살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 소학교 5학년에 학교를 중퇴하고 엄마를 도와 동생들 넷을 돌봐야했다.

아버지가 사망해서 달포가 지난 뒤에 있은 일이라고 기억된다. 이웃마을 왕씨라는 한족아저씨가 소식을 접하고 사탕, 과자 한꾸러미를 사들고 우리집에 찾아왔다. 경제가 유족한데 아들 하나밖에 없어 딸 하나 데려다 키우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몸이 허약하고 사흘이 멀다하게 아픈 엄마는 자식 중 어느 하나라도 잘 사는 집에 가서 잘 먹고 잘 크면 좋지 않느냐며 우리오남매를 둘러보더니 나더러 왕아저씨를 따라가라고 했다. 그때 철부지인 나는 인차 대답했다. 왕아저씨네 집에 가면 사탕과자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고 하니깐.

헌데 언니가 죽기살기로 반대할 줄이야. 한족집에 가면 우리말 우리글을 다 잊어버려 완전히 한족으로 변해버리니 절대 갈 수 없다고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죽을 먹어도 같이 먹고 굶어도 같이 굶자고 언니는 우리 4남매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하여 왕아저씨는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언니는 매일 유복자 남동생을 업고 네살, 일곱살 나는 녀동생을 돌보며 물 긷고 밥 짓고 저녁이면 소학교에 다니는 남동생(나의오빠)의 숙제도 검사하고 모르는 것은 가르쳐주기도 했다.

매번 언니가 오빠의 숙제를 검사할 때마다 내가 곁에서 집중하여 듣고 있으니 언니는 내가 공부에 남달리 흥취를 갖고 있다고 시간이 있으면 자음모음을 가르쳐 주었으며 자모음을 읽을 줄 알자 글자를 배워주고 단어 만들기 유희도 놀아주었다. 하여 나는  1학년 입학 때 조선어 제1권을 거의 다 읽을 줄 알았다.

언니는 시간이 있으면 동생들과 함께 유희도 놀아주고 춤과 노래도 배워주고 재미나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가끔가다 노래, 춤, 이야기 시합도 조직했다. 하여 우리 사남매는 소학교에 다닐 때 학교의 인기인물로 되였으며 나는 수차 학교를 대표하여 향, 현 무대에 오르는 공연에 참가했다 .

언니는 또 부지런하여 겨울만 되면 학비를 마련한다고 가마니부업도 하고 돈 한푼이라도 절약한다고 솜을 사서 물래도 자아서 두툼한 내의를 떠주고 목도리, 장갑, 양말도 떠주어 우리형제들은 겨울에 별로 추위에 떨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한테서 듣기로 우리나라에서 3년 재해가 들어 집집마다 죽을 끓여먹을 때 언니는 항상 자기 몫의 죽을 동생들에게 고루고루 나누어주다 나니 배를 곯아 쓰러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고 한다. 하지만 한번도 힘겹다는 말, 배 고프다는 말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유복자인 남동생이 유치원에 다니고 나와 녀동생 그리고 오빠가 소학교와 초중을 다닐 때 언니는 우리의 뒤바라지를 위해 현성에 있는 화학공장에 취직하여 밤낮으로 일을 했다.한때 두개씩 내주는 거위알만한 강냉이 떡을 하루 세개씩 남겨서 휴일만 되면 모아놓은 떡을 보따리에 싸가지고 와서 배 곯는 동생들에게 나눠주어 그때 맛나게 먹은 우리형제들은 휴일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 때 언니는 제대로 먹지 못한데다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겠다고 결석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주야로 작업하다 보니 영양실조로, 과분한 체력소모로 작업장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적도 있단다.

한번은 공장장 사모님이 언니더러 먹으라고 물만두 한사발을 가져다주었는데 배를 곯고 있을 유복자 동생이 눈에 밟혀 밤에 60여리되는 길을 6시간이나 걸어 집에 왔다가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한개씩 나눠주고 남은 물만두를 유복자동생에게 안겨주고 30분도 앉아있지 못하고 되돌아갔다고 한다 .

이렇게 언니는 오직 형제자매들을 생각하고 자신을 가정에 헌신하다 보니 시집도 늦게, 그것도 어머니가 준 돈 30원도 동생들 학비에 보태라고 몰래 농안에 넣어놓고 돈 한푼없이 맨몸으로 집을 떠나갔다. 시집을 가서도 동생들을 잊지 않고 뒤시중을 했다.

내가 중학을 졸업하고 마을에 돌아와 "흑룡강일보" 통신원으로 활약할 때 우리글을 부지런히 쓰라고 친정에 올 때마다 편지 봉투와 우표를 가득 사가지고 왔다. 내가 사범학교에 추천 받았지만 학비가 모자라 고민에 쌓였을 때도 언니가 찾아와 밤을 패며 탈곡장에 나가 북대기를 털어 모은 낟알을 팔아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나의 옷 한벌 지어주고 학비도 보태주었다 .

언니의 파란만장한 고생살이, 눈물 고인 자욱자욱을 어찌 한입으로 다 말 할 수 있으랴.

언니의 덕분으로 우리형제들은 모두 중학, 대학을 나와 도시에서 취직을 하여 월급쟁이로 되였지만 오직 언니만이 시골에 남아 살다가 고향인 한국으로 갔다. 그간 형제들이 언니한테 잘못한 적이 많고도 많았지만 털끝만한 유감도 내비친 적 없었고 한번도 가정을 탓해본 적이 없었다 .

정녕 언니는 한떨기 아름다운 꽃이며 꽃동산의 한떨기 수수한 채송화다 .

 

  2016.10.02 정순금.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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