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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동호의 그 옛날 그 이야기-인분을 먹은 사람
2021년01월11일 15:06   조회수:759   출처:청도조선족작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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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인분을 먹은 사람

림동호

 

 

인분을 먹은 사람

 

1970년도 내가 살던 마을에 고치기 위해 인분을 먹은 사람이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어설프게 하거나 완벽하지 못할 꾸짖는 '통일어' 한마디가 있었다'

"똥이나 처먹을 놈아!"

말을 누가 했거나 누가 들었거나 따지고 드는 사람이 없었다. 말한 사람은 이상 어른이고 잔소리를 했을 뿐이고 들은 사람은 잘못을 저질렀기에 탓하지 않지만 마을에서 오직 사람만은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시 저놈이 금방 처먹은 놈이라고 나를 욕한 아니었나?

송철이 삼촌(종친) 누가 똥에 대해 얘기하면 혹시 자신을 비웃거나 욕하거나 자신을 놀리는가 싶어 무척 신경을 썼다.자신이 허리병(디스크) 때문에 결심을 내리고 인분을 반에 사발을 먹은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하루 생산 대장의 심부름으로 강남의 생산대에 가서 40근의  종자벼를 어깨에 메고 돌아오다가 원길대로 에돌아가면 6리길 되지만 제방뚝을 타고 질러가면 3 길도 되지 않았다.

- 어쩔까? 생산 대장이 빨리 갔다 오라고 했는데, 에라 질러가자.

송철이 삼촌은 종자벼를 어깨에 애들이 가지고 만들어 놓은 제방뚝 계단을 한층 한층 조심스레 내려가다 그만 오른쪽 다리가 동네 장난기 많은 애들이 계단에 파놓은 함정에 빠져 "아이쿠!" 소리와 함께 종자벼를 뿌리치고 제방뚝 10여개의 계단을 굴렀다. 한참 제정신이든 송철이 삼촌이 툭툭 털고 일어서려 허리와 오른쪽 다리가 아파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 제방뚝을 지나던 생산대 영수란 사람의 도움으로 부추김을 받고 집에까지 있었다.

 

대대() 맨발의사(赤脚生) 옥도전기(酒) 온몸에 발라주고 괜찮냐고 물었다. 송철이 삼촌은 오른쪽 다리와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다고 했다. 송철의 숙모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했다. 크게 다쳤으면 어쩔 뻔했냐고 다음부터는 모든 면에서 조심하라고 했다. 송철이 삼촌은 애들이 그런 곳에 함정을 파놓을 누가 생각했냐며 새끼찾는 염소마냥 앓음소리를 길게 뽑았다.

 

송철이 삼촌은 마누라가 아무토록 이쁘고 고맙기만 했다 마누라 영옥이는 부모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자신에게 시집왔기 때문이었다. 영옥이 엄마는 빈농집의 딸이 지주집으로 시집가는 법이 어디에 있냐며 얼려도 보고 얼음장도 놓고 빈농집의 딸이 지주집에 시집가면 빈농을 반변한 반역자라구 정치공세도 들이댔지만 효과가 없게 되자 머저리 같은 개간나새끼라고, 네년과 계급 계선을 나누어야 한다며, 머리채를 잡아 쥐고 애완견을 훈련시키듯 마구 흔들었다. 결국 영옥이는 무서운 구박에 배기고 한밤중에 결혼식도 없이 누구의 축복도 없이 송철이 삼촌을 찾았던 것이었다.

 

영옥이 아니었으면 50살이나 처먹도록 이성에 대해 전혀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시기에는 헌신도 짝이 있다고들 했는데 그건 오로지 빈하 중농들을 대상한 속담이지 지주 부농을 대상해서 나온 속담은 아니었다. 

지주 부농 자식들은 대부분이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이혼 자리나 불구자들 중매가 있긴 했지만 이혼 자리나 불구자라고 포기했다간 평생 외톨이로 살아야 가능성이 많았다. 그래서 지주나 부농 성분을 가진 집의 자식들은 마누라를 맞는데서는 '이삭줍기'라도 해야했다. 그런데 영광스러운 빈농 가족의 영옥이가 넝쿨째로 제집으로 굴러들어 줄이야. 남들이야 뒤에서 뭐라든 행복해서 쓰러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후에 영옥의 엄마가 대대()혁명위원회 주임을 찾아가 지주놈 새끼 자기네 어린 딸을 꼬시어 혁명의 대오를 파괴하려 든다고 고발했지만 조사를 마친 결과는 꼬신 것이 아니라 자원적이어서 좋은 쪽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다행히 송철이네 삼촌 집식구들이 마을에서 덕을 많이 쌓았기에 누가 집식구들을 내다 비판 투쟁하려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위신이 좋았다. 그런데 이런 청천 벼락이라구야. 허리와 오른쪽 다리가 아파서 돌아누울 수도 없었다. 벌써 달이 지났는데 겨우 쌍지팡이로 변소 출입이나 있는 형편이었다.

 

송철이 삼촌은 병문 생산 대장에게 자기가 함정에 빠져 상한 것은 다른 빈하중농들이 빠지지 말라고 경종을 울린 거나 다름없기에 빈하중농들이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변했다고 했다. 생산 대장은 말에 감동을 먹고 10일간의 공상()으로 품값을 계산해 주겠다고 했다. 송철이 삼촌이 머리가 좋긴 좋았다. 마디 뼈다귀 있는 때문에 10일의 공상품을 받게 되었다. 송철이 숙모는 자기 남편이 똑똑한 알았지만 밖에 나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잘못했다간 모두가 수포로 되기 때문이었다.

 

어느 뒷마을 송철이 외할머니가 시내에 갔다가 어느 중의에게서 어열(타박상)에는 인분이 최고란 말을 듣고 일부러 송철이 삼촌에게 알려주려고 들렸다. 처음엔 죽으면 죽었지 그런 짓은 한다고 했다. 사람이 어떻게 똥을 먹는가고 반박했지만 할머니가 집에 다음 며칠간 깊이 고민하다가 계속 이대로 뻗치다간 잘못하면 평생 쌍지팡이를 던질 없게 되는데, 그리고 사돈 노친이 꾸며 말도 아니고 현에서 이름난 중의가 말인데. 송철이 삼촌은 결심을 내리고 실천하리라 다짐했다. 평생 개고생보다는 나을 같았다. 영옥이를 위해서라도 영옥의 뱃속에서 움틀 거리는 셋째놈 때문이 서라도 결심을 내려야 했다.

지금 같으면 병원이나 약국에 가서 캡슐(囊) 사다가 인분을 캡슐에 넣고 삼키면 냄새도 없고 먹기도 편하련만 그때 시기에는 캡슐이란 것이 없었기에 직접 먹는 수밖에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 새벽 송철이 삼촌은 집에서 고양이의 밥그릇(이빨 빠진 사발) 전날에 마을의 구멍가계에서 받아놓은 술병을 챙기고 집과 20미터쯤 떨어진 생산대의 공용변소로 향했다. 주위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변소에 들어가 고양이의 밥사발로 인분을 퍼서는 왼손의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누르고 길게 숨을 내쉰 눈을 감고 오른손에 들었던 고양이 밥사발에 담긴 인분을 후룩후룩 푸대죽 마시듯 마셨다. 그리고는 집에서 가져간 술병을 찾아들고 2 되는 술을 단모금에 꼴락 꼴락 양치질하며 쑥하고 넘겼다.

그러나 술이 위에 들어가기도 전에 왝왝 토했다. 창자가 밖으로 나올 정도로 토했다. 모두 토하면 무슨 효과가 있을까고 퍼마셨다. 쿠리고 짭고 맵고 떫고 씁고 쉬고 도저히 형언할 없는 냄새 때문에 온몸이 오싹해 났다. 그래도 다리와 허리병을 고친다는 데야 먹을 것이 없었다. 송철이 삼촌은 남은 냥의 술을 모금에 쭉했다. 송철이 삼촌은 쌍지팡이를 짚고 어떻게 집까지 돌아갔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송철이 삼촌은 앞의 물펌프로 물을 올리고 물로 양치질을 스무번도 넘게 했고 또한 얼굴까지 깨끗이 씻고 집에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속이 계속 울렁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저녁부터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추웠다 더웠다를 반복했는데 몸살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오후부터 설사가 시작했는데 멎지를 않아 바지에다 볼일 보고 말았다. 토해야 멀건 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몽둥이에 얻어맞은 것처럼 퍼럿딩딩했다. 어열의 독을 바깥으로 배출하는 걸까? 이튿날부터는 머리도 빠지기 시작했다. 송철이 삼촌의 얼굴색은 완전이 흑인을 방불케 했다.

 

송철이 외할머니는 사정을 알고 사망 사고가 같아 겁이 나서 중의를 찾아 갔는데 중의는 일종의 반응일 것이라 했단다. 모든 고비를 넘기면 내가 언제 이랬냐며 툭툭 털고 일어설 것이라 했단다.

송철이 삼촌은 이러다가 죽지 않을까? 생각에 자신의 소홀함을 깨우치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였다. 송철이의 숙모는 송철이 삼촌 곁을 발짝도 떠나지 않았다. 동네 어른들이 송철의 숙모에게 " 가지 마음으로 가지 준비" 하라며 후사 처리 준비까지 시키고 송장을 지킨다며 밤을 샜다. 벌써 나흘째였다.

일주일이 지나자 마을 노인들이 금방은 죽을 같지 않다며 밤을 지키지 않았다. 반대로 송철이 삼촌은 바깥 구경을 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래서 영옥의 부축하에 앞에서 걸음마 띠기를 연습했다. 어린애들이 첫걸음마 때와 같았다. 다만 영옥이가 받쳐주는 바람에 주저안거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힘들면 쉬였다를 반복했다.

언제부터인가 부축 없이도 지팡이를 짚고 동네 마실도 있었다. 쌍지팡이를 던지지 못해서 그렇지 몸은 아픈 데가 곳도 없었다. 허리와 다리도 언제 아팠냐 싶었다.

 

그해 연말에 송철이 삼촌네 집안에 대경사가 생겼다. 송철이 삼촌의 셋째 아들놈이 바로 송철의 동생뻘이 되는 애가 고고성을 울리며 세상에 태어났고 송철이 삼촌 쌍지팡이도 뒷마을 사람이 빌려 쓰자는 이젠 쓸모가 없다며 아예 줘버렸다.

동네 어른들은 50살에 애를 만들 있다는 자체가 믿기지를 않는다고 했다.

 

송철이는 나보다 두살 위였지만 항상 나와 딱친구로 지냈다. 채발이나 반두로 냇가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나누어 가질 때면 그냥 나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항상 나보다 적게 가졌다. 학교를 졸업하고 귀향했을 때도 나와 단짝이 되었었다. 자기 삼촌이 인분을 먹은 얘기를 수호전이나 서유기, 홍루몽처럼 구수하게 엮어서 나에게 들려주었는데 그의 표달 방식과 웅변 수준에 빠진 내가 토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나와 송철이 있을 때만 송철이에게 '너네 삼촌'이라고 불렀다.

 

어느 생산대에서 논뚝 감기를 했는데 송철이 삼촌이 가래장부를 대고 나와 성수 아저씨가 가래줄을 당겼다. 쉴참이 되자 논뚝에 잡풀들을 줌씩 뽑아서 깔고 앉아서는 초담배를 피우며 한담하기 시작했다. 노인의 대화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봄에 인분을 먹었다는 정말인기여?"

"먹구 말구, 병을 고친다는데 못먹을 것이 어디 있겠수?"

" 죽으면 죽었지 인분은 못먹을 같혀."

"형님! 나도 처음엔 그랬수. 아무렴 젊은 나이에 죽는 것보담 났잖갔슈? 젊은 마누라 남겨놓고 죽으려니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았어유. 정말 더럽고 미안하고 수치스럽구 죄송하고 잘못 같지만 형님도 보다시피 나의 모든 병이 죄다 살아졌수다. 이젠 아픈 데가 없슈."

"그래도 ..."

 

그러던 1979 동네에서 애들까지도  먹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기에 자식들께 먹은 사람의 자식이란 별명을 주어선 된다고 생각해서 송철이 삼촌은 멀리 녕안현으로 이사를 갔었다.

지난해 한국에 갔을 송철이를 만났댔는데 나는 송철이에게 똥삼촌에 대해 물었댔다. 송철이는 술상에서 무슨 얘기냐며 몇년 전에 상해에 있는 늦둥이네 집으로 갔는데 아직 생전이라고 했다.

지난해 송철이 삼촌 연세가 98세라고 했었다. 건강과 정신 상태를 봐서는 아직 10년은 문제없을 같다고 했다. 이상한 것은 내가 어렸을 그가 애주(酒), 애연(烟), 애락(爱乐), 애색(色) 소문을 들은것 같은데 그의 장수비결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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