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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  좋은 글  >  차설매의 수필-이웃의 정
차설매의 수필-이웃의 정
2020년11월26일 14:44   조회수:220   출처:청도조선족작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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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웃의 정

차설매

 

이웃의    


 내일은 우리 나라 국경절이면서 전통명절인 추석이다. 자식들은 명절이여도 비상시기여서 (학생들을 외지로 못나가게 함 ) 올수도 없지만 나와 남편은 일찍부터 시장에 가서 고기에 월병에 우리 민족 음식인 찰떡이랑 시루떡쉼떡 등을 많이 사왔다. 금방 집에 들어서서 짐들을 정리하는데 밖에서 똑똑하고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문을 열자 건너집에 사는 쑈반이 아들딸을 앞세우고 환하게 웃으며 서있었다. "내일은 추석이여서 두분에게 선물을 좀 샀어요. 두분 건강하시고 명절 즐겁게 보내세요. " 라고 하면서 여러가지 선물을 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는 아들딸들더러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명절의 인사를 시켰다. 나도 금방 사온 물고기 한마리와 찰떡이랑 월병이랑 한아름 건네 주었다. 우리는 서로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를 하였다. 우리는 아빠트단지에 같이 산지 몇년밖에 안되지만 인젠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좋은 이웃으로 되였다. 서로 다른 민족이 금년같은 살벌한 비상시기에 이렇게 서로 스스럼없이 친하게 보낼수있다니 이건 보통사이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자식도 아닌 한족 이웃 젊은이에게서 추석선물을 푸짐히 받아든 나는 너무 고맙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가슴이 찡해나며 눈굽이 젖어듬을 어쩔수 없다어느새 나의 눈앞에는 지난날의 잊을 수없는 감동적인 일들이 영화필림처럼 지나간다.

   코로나온역이 살판쳐 숨쉬기도 힘들었던 2월말이다. 청도에는 요지음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찬비가 구질구질 내린다. 아직 봄비가 내릴철도 안되였는데  무슨 조화인지 매일  하늘에 검은 구름이 떼를 지어다니고  궂은 비를 추적추적  내려보내 만물이 으스스한 찬기운속에서 쪼크리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밖으로 못나가고 집에 같혀있은 지도 한달이나 된다. 가슴이 답답하고 고독스럽고  코로나에 매일 감염되고 매일 숱한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소식에 슬프기도하고 어딘가 공포감도 머리를 쳐들고 온몸을 칭칭 감싸는 것 같다. 마트에도  마스크를 두개씩이나 끼고 며칠에 한번씩 가고 엘리베트에서 사람을 만나도 너무 싫다. 사람이 이렇게 무섭고 싫어보기는 처음이다.

    그렇게  갈팡질팡 보내던 어느날이였다. 난데없이 똑똑 문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우리 부처간의 눈길은 허공에서 부딪쳤다. 자식들은 모두 외지에 있어 이렇게 올수도 없구, 아파트단지도 봉쇄하구 다른 사람은 절대 들여놓는데 도대체 누가 찾아와 문을 두드릴가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데가 없어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런데 똑똑똑 하고 문을 두드린다. 하는 수 없이 우리 선생님이 문을 열지 않고 소리로 "누구세요?" 하고 소리쳤다. 그러니 문밖에서 "아이, 워쓰 401 카이먼바." (이모, 나는 401 사람이예요. 문열어줘 요.) 라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403호이고 바로 맞은켠  한족집 젊은 내외가 401호에 살고있었다. 평시에 별로 래왕이 없던 한족 젊은이가 우리를 찾을가 하는 의문을 갖고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열자 커다란 채소상자를 건너집 젊은이가 마스크를 낀채 가까이 다가 오지도 못하고 멀리찍이 서있다. " ㅡ바깥출입이 불편할것같아 채소를 사왔어요. 무슨 곤난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라고 하는것이였다. 순간 우리는 가슴이 먹먹하고 말문이 막혀 그저 "쎄쎄" (감사합니다.) 자꾸만 되뇌였다. 너무도 생각밖의 일이라 우리는 채소곽을 받아놓고 한참이나 둘다 할말을 잃었다. 드디어 내가 채소를 한가지씩 꺼내보았다. 감자, 가지, 밭미나리, 부추, 시금치, 오이, 토마토, 상추, 호박 어쨋든 열가지  채소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제일 밑에 "바쁜 일이 있으면 찾으세요. 401  쑈반" 이라고 적혀있고 자기의 전화번호까지 적어서 담았다. 우린 둘이 청도가 아닌 다른 도시에 살아 비상시기에 너무 고독스럽고 두렵기도 하였는데  건너집 한족 젊은이가 이렇게 자식들이 못하는 애틋한 관심을 보여주니  둘이 쳐다보며 눈물이 날지경이였다. 우리에겐 그것이 채소가 아닌  더없이 사랑의 마음으로 느껴졌고 난리에 다른 민족의 늙은이들을 관심하는 금쪽보다 귀한 인간애를 느끼면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채소들을 어루 만지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나는 사랑의 마음이 듬뿍담긴 채소들을 사진찍어  나의 딸들에게 위쳇으로 보내고 나의 친구들 위쳇방에도 올렸다. 모두들 좋은 이웃을 두었다고 감탄하였고 특히 우리 두딸은 너무 감사하고 미안해서 눈굽이 젖어들었다.

     옛날부터 이웃이 사촌이란 속담이 있지만  지금은 이웃이 부처간보다 자식들보다 가까울 때가 많은 것 같다지금은 부처간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도 많고 친자식들도 서로 떨어져 살다나면 (기실 자식들은 한 시각도 부모들을 잊은적 없고 관심하고 있지만)   남보다 못할 때가 있으니  어떤 땐 이웃이 누구보다 낫다고 보아야 할것같다. 그리고 아파트에 살다보면 몇년을 살아도 이웃이 확실히 누구인지도 모르고 알더라도 만나면 고개나 끄떡하고 지나면 그게 다다. 한족이 이웃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조선족보다 인정이 적고 냉정하다고 느껴오던 나는 관건적인 시기에 도움과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준 이웃 젊은이의 처사에서  많은 점을 느끼고 사색하게 되였다. 누가 한족을 감정이 무딘 민족이라 하였던가! 우리는 소중한  채소를 먹을 때까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건 그저 채소가 아닌 사랑과 방조, 관심이 가득 담긴 인간의 숭고한 정이였다.

   이웃의 정에 너무 감동된 우리는 자식들이 설에 오면 먹이려고 준비했던 여러가지 고기들과 (많이 준비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오지못했음) 애들의 먹일 것들을 가득사서 건너집 쑈반네 집에 건네다 주었다. 그후부터 우리 두집은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 찾고 알리는 가까운 사이로 지내고 있다.

이웃지간의 감동적인 일들은 이뿐이 아니다. 몇년전에  있은 일이다. 내가 엄중한 심뇌혈관질병으로 머리에 공급이 멈추다싶이 되여 쓰러졌을 때다 . 곁에 자식들도 없고 마침 남편이 조카 결혼식에 참가하러 먼곳에 가고 없었다.

위급한 시각에 나는 가까이에 사는 이웃 친구들께 간신히 전화로 알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친구 셋이 달려왔다. 한 친구는 상해에서 나의 외손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고 다른 친구는 어지러워 머리도 들지못하고 눈도 뜨지 못하는 나를 부축하여 무조건 응급실로 데려갔다병원에 가서 친구는 달아다니며 수속을 밟고 다른 친구는 어쩌지 못하고 마구 토하기만 하는 나를 붙들고 갖은 시중을 들어주었다. 응급실 의사들의 구급을 통해 나는 죽을 고비를 넘겼고 전화를 받고 밤중 비행기를 타고 병원에 달려온 남편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튿날 새벽이였다. 전날 오후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시간을 친구는 친인처럼 나의 온갖 시중을 들어주고  나를 부단히 안심시켜주면서 나에게  견지하도록 힘과 용기를 주었다 남편은 두분 친구에게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억지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몇년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어제일처럼 기억에 생생하고 그때의 감동이 지금도 마음속 깊이 아로 새겨져 항상 이웃에 사는 나의 친구들이 감사하고 고맙기만 하다.

이웃의 정은 가까이에서만 오고가는것이 아니다. 우리가 동북의 고향에 있을때 거의 십년을 같이한 이웃이 있었다. 우리보다 10여년 젊은 같은 교육계통의 분들이였는데  형제간처럼 지내였다. 그런데 우리가 청도에 오게 되여 함께 이웃으로 살지 못해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사업하던 단위와 공자관계가 고향에 남아있어 시끄러운 문제들이 여간 많지 않았다. 지금은 월급도 보충금도 카드로하게 되여 많이 쉬워졌지만 이전엔 그렇지 못했다. 월급도, 보조금도 타서 부쳐주고 해마다 의료보험비로 약을 사서 부쳐주며 우리 부처간이 입원한 자료들을 부치면 시끄러움도 마다하지 않고 의료보험국에 달아다니며 보험비를 찾아서 부쳐주군하였다보험비를 조금이라도 받으려고  자기네 돈으로 사람을 찾아 먹이면서 공작할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더우기 시끄러운 일은 이것 뿐이아니다. 내가 신분증을 잃어버렸을 때도 공안국에 인맥을 통해 내가 가지 않고도 해보냈고 재작년에 호구를 청도호구로 바꿀 때도 고향쪽에서 호구를 떼여보내는 번거로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깨끗이 해보내 우리는 호구까지 산동호구로 호적을 바꾸었다. 그외에도 당비도 대신 바쳐주고 (자금은 위쳇으로 하지만) 해마다 단위에서 내주는 기념품같은 것도 자기네가 돈을 내서 부쳐주군 한다. 1년도 아닌 12년이나 이웃의 시끄러운 일들을 이렇게 책임지고 해준다는 것은 실로 간단치 않다. 우리가 갈라진지 십여년이 지났지만 우리의 정은 끝나지 않았고 더욱 돈독하여졌다. 그리하여 어쩌다 고향에 한번가면 우리는 의례히 옛날의 이웃집에 짐을 풀고 제집처럼 편안히 보내며  그들이 어느해인가 청도에 왔을 때도 의례히 우리 집에 머물면서  형제처럼, 친척처럼  반갑게 지내고 산천경개도 흔상하였다.

그렇다. 좋은 이웃은 때로는 친척보다 형제보다 자식보다도 좋고 가깝고 실제적인 필요한 관계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인지상정이며 보약같은 인간의 사랑의 정이 아닐가잘먹고 잘사는것도 행복이지만  남남이 서로 걱정해주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것이 인간으로서는 제일 즐거움이며 행복인 것 같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린 좋은 이웃들을 만나 행복했고 신세도 많이 졌다. 그래서 우리도 지금 이웃들이 바쁜 일이 있거나 위급한 일이 있으면 밤중에도 달아니며 돌봐주고 병원에 가서 호리도 해주며 지극정성을 다하군한다.

맨날 아픈 나는 만약 곁에 사람이 없으면  제일 먼저 어느 친구, 어느 이웃에게 전화로 구급을 청할가 생각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자식들이 먼곳에 있기에 불러도 제때에 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년부터는 새로운 희망이 생겨났다. 바로 건너집의 쑈반을 제일 먼저 알릴 수 있지 않은가. 그래, 민족은 달라도 우리 가까운 이웃기에…  아름다운 감정은 피와 민족을 초월해서 서로의 마음속 깊은 곳에 소중하게 간직되여 있는것이다. 그러기에  좋은 이웃을 만난 것도 행복이지만 수선 먼저 내가  그들의 좋은 이웃이 되여야 겠다. 사랑보다 더 귀중한 것이 정인데 그 정은  반드시 오고가야 하기때문에…

   

                        2020.9.30  청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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