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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의 수필-려행비수기의 홍촌행
2020년08월20일 12:20   조회수:500   출처:청도조선족작가협회
수필

려행비수기의 홍촌행

박영희

   

려행비수기의  홍촌행

 

 

해마다 수많은 유람객들이 시도때도 없이 밀물처럼 쓸어드는 곳,  특이한 력사적 문화유적으로 이미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중국화 속의 향촌마을인 안휘성의 홍촌(安徽宏村)을 나는 이번에 두번쨰로 찾을  기회을 가졌다. 그것도 려행비수기인 12월이였다.

수년 전 여름방학 때에 안휘성 소재지인 합비에 학교의 일로 갔다가 회의 끝에 려행사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 속에 휩슬려 말 그대로 말타고 꽃구경”으로 홍촌의 고적과 명소를 두시간 남짓이 한바퀴를 휙 돌아 본 적 있다. 조금은 유감이 남았었다.

하지만 이번 려행은 홍촌 려행이 처음인 동행의 강력한 주장으로 여유롭게 자유행을 하기로 했다.

홍촌은 안휘성 동북부에 자리잡고 있는 이현(黟县)으로부터 11킬로메터 떨어져 있다. 남송때로부터 시작하여 800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는 홍촌에는 지금 140동의 명나라와 청나라 때의 고대 민가가 그대로 보존되여 있다. 독특한 건축 구조와 정교한 나무 조각으로 안바침된   민간고궁과 소 모양으로 설계된 기이한 마을 구조,중국 최초의 수도물로 불리우는 마을의 가가호호를 에돌아 흐르는 1200메터의 물도랑, 그리고 수려한 남호 풍격을 세세히 흠상하고 싶었다.   

12월20일 12시경 황산북 고속철 역에 내리니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고속철 역에서 관광뻐스 역까지 500여 메터 되는 구간이 지붕있는 회랑으로 연결되여 있었다.

비수기인지라 한시간마다 떠나는 관광뻐스는 우리 둘과 다른 손님 하나를 달랑 태우고 출발했다.

12월 중순이 지났는 데도  산과 들은  북방의 봄을 방불케 했다. 대지는 온통 푸른 주단을 그대로 뒤집어 쓴듯 푸르디 푸르다. 가는 비속  몽롱한 안개는 멀리의 산허리를 감돌고 정교한 다락밭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예술품이였다.

한시간 반 후 우리는 홍촌 유람지 서쪽 출입문에 도착했다. 마침 비도 멎고 맑고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있었다.

온라인에서 예약한 려관집 주인이 뻐스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등키에 상냥하게 생긴 려관주인은 사람좋게 열정적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려관에 행장을 푼 우리는 려관 안주인의 안내를 받으면서 홍촌 주변을 둘려 보려고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홍촌 유람지 안에는 무료 해설원들이 고객들을 맞아주고 있었다.

겨우 600호에 인구가 1천여명 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향촌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매일 1만명 이상에 달한다고 한다. 비수기인 지금도 하루에 3천명을 웃돌고  있다고 한다.

뻐스를 탈 때와는 사뭇 다르게 늦은 오후부터 삼삼오오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자유롭게 거니는 젊은 남녀들의 다정한 모습이 보기 좋았고 사진기를 목에 걸고 여유작작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단신 남녀들도  적지 않게 눈에 들어온다. 그중에서도 배낭 려행을 온 듯한 한 녀학생이 가장 눈에 띄였다. 예쁘장한 얼굴에 상큼한 옷차림을 한 그녀는 큼직한 배낭를 메고 묵직한 사진기를 들고 다니면서 부지런히 샤타를 눌러댔다.

 우리는 오후 시간을 먼저 홍촌과 가까운 유적지인 루촌에 가보기로 했다. 운 좋게 큰길가에 나서자 삼륜차를 만났다. 10원을 주니 기사는 생각밖으로 마을 밖의 원경대라는 곳까지 덤으로 안내해 주었다. 원경대의 높은 산중턱에 올라서니  홍촌의 주위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었다.

황산의 웅위롭고 깍아찌르는 듯한 험산 절벽과 달리 이곳은 아담하고 작은 산들로 둘러 싸여 있었다. 오전에 내린 비로 인해 촉촉히 젖은 주위의 산과 들은 깨끗이 씻은 듯 맑고 정갈했고 휘주문화의 특색 건축물인 회색기와 흰벽의 민가들은 옹기종기 보기 좋게 어우러져 푸르디 푸른 대지에 살폿이 내려 앉은 듯 하다. 말 그대로 어디를 둘러 보아도 아름다운 한폭의 수채화가 분명했다.

백화 만발한 뜨거운 여름을 요염하고 아름다우며 불같은 정열을 지닌 녀인에 비한다면 지금 이 안온한 날씨의 자연 풍경은 단아하고 정교하며 다소곳한 모습의 녀인을 연상하게 한다.

12월은 홍촌의 려행 비수기로써 사계절 중 비가 가장 많은 우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름방학 때의 려행처럼 숨이 쿡쿡 막히는 찜통 무더위와 떼를 지어 몰려 오고 몰려 가는 인파에 시달리고 관광 단체와 가이드만 따라다니느라고 다른 사람들의 뒤통수 외에 별로 본 것이 없었던 경험에 비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관광인지 몰랐다.

  저녁에는 당지의 음식문화를 료해할 겸 주인에게 홍촌의 특색 료리를 주문했다. 역시 휘주 특색 음식에서 빠뜨릴 수 없는  발효된 물고기(臭鲑鱼)와 철판발효두부요리(毛豆腐) 그리고 죽순볶음을 추천 했다. 썩은두부(臭豆腐)는 익히 알고 있지만 철판발효두부요는 처음이여서 나는 먹을 자신이 없었다. 료리 전에 도대체 어떤 것인지 먼저 알고프다고 하니 보오얀 털부숭이의 작은 두부 쪼각을 들고 왔는 데 그 회색털의 길이가 3, 4센치는 되게 자라 있었다. 나는 끔쩍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곰팡이가 련상되여 보기마저 끔찍스러웠다. 그러나 동행자는 문화 체험 차원에서 맛보자며 자신없는 제의를 해왔다. 그래도 주인이 기름에 맛갈스럽게 구워놓으니 그나마 너무 볼썽 사납지는 않았다. 권유에  이기지 못해 한 입 맛을 보니 암모니아 냄새가 약간 나는 외에 괜치 않았다. 臭鲑鱼는 나의 구미에 맞았다. 쫀득거리는 부드러운 촉감에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간에 고소하고 안성 마춤한 발효 맛이 어울려 구미가 당겨  저도 모르게 휘주의 주식인 쌀밥 한공기를 뚝딱 하고는 또 한사발 더 요구했다. 주인은 옆에서 사람좋게 웃어주었다.

이틑날 아침 들뜬 마음으로 홍촌의 서쪽문에 들어섰다. 12월은 휘주(徽州)지역의 우기인 동시에 일년 중 가장 추운 겨울이라고 한다. 이날 아침 기온은 15도였다.

  어느덧  맞은켠 다리 너머에서 몇몇 빨간 등산복을 입은 해설원들이 유람객들을  거느리고 이쪽으로 신나게 걸어오고 있었다. 나도 생각을 멈추고 유유히 그 대오속에 끼여들었다. 자유행도 해설원이 있어야 제멋이다.

홍촌은 남송때로부터 시작하여 이미 800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는 데 휘주의 제일 큰 성씨인 왕(汪)씨 자손들의 집거지였다. 몇 세대를 걸쳐 개발하고 계획하여 1607년에 지금의 특이하고 정채롭기로 소문난 소모형으로 된 마을이 완성되였다고 한다.

천연 물길을 끌어들이고 원래 샘물을 리용하여 지금의 이름난 “중국화”속의 아름다운 그림인 남호(南湖)와 반월담(半月潭)을 구축했고 집집의 문앞을 에돌아 흐르는 1200메터되는 최초의 천연 “수도물”로 불리는 물도랑을 만들었다. 하여 형상적으로  남호는 “소의 위”(牛胃), 반월담은 “소의 복부”(, 물도랑은 “소의 창자”(牛, 140여호의 명나라와 청나라의 민가를 포함한 집들은 “소의 몸뚱이”(牛身), 산은 “소의 머리”(牛, 4개의 나무다리는 “소의 4다리”(牛脚), 두개의 하늘을 뻗치는 거대한 고목은 “소의 뿔”(牛角) 로 지칭되였다. 참으로  그 신기함과 지혜에 감탄과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 위대한 생태 공정을 찬미할 때마다 한 사람의 이름을 거론한다.  바로 왕씨 가문의 며느리인 녀호걸 호중랑(胡重娘)이다. 기재에 따르면 명나라 때(1403-1424) 왕씨 가족의76세조인 왕신(汪辛) 부부가 세차례 국사(国师)인 퐁수선생을 모시고 대규모적으로 지리를 탐사하고 계획하였다고 한다. 당시 쪽발 녀인이였던 호중량이 남편 왕신이 밖에서 관리직을 맡고 있었기에 남편을 대신하여 10년 간 매일 같이 가마를 타고 “국사”인 하가달(何可)을 따라 다니면서 직접 주위의 지리 산맥과 물의 흐름 방향을 세심히 조사하여 설계를 마쳤다. 

남존녀비의 그 시대의 쪽발녀인이 남자들을 찜쩌 먹을 용기와 총명으로 만세에 길이 전해지는 위업을 이루었으니 어찌 감탄을 금할 수 있으랴.

다음에 이른 곳은 “민간 고궁”으로 불리우는 용지당(承志堂)이였다. 용지당은 청나라 때 휘주의 대상인 왕정귀(汪定)가 1855년에 수건한  주택이다. 3000평방메터의 건축면적에 집안의 나무 기둥만 136개가 되였다. 거기에 출입문이 60개이고 창문이 60개이며 7개의 다락방이 있었다. 그리고 집안에는 우물만 9개가 있었다. 기둥마다 그림과 가훈 명언들이 새겨져 있는 데 그 기둥에 쓰인 황금만 100여냥이 된다고 한다.

용지당의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대량의 정교하고 섬세하게 새긴 목각 예술품이였다. 무릇 기둥과 창문살들엔 어디에나 조각작품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용지당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진짜 조각 예술을 모른다”는 말뜻을 다시 되새겨 보았다.   

이어 남호로 향했다. 남호는 1607년에 항주 서호의 “평호추월(平胡秋月)“ 모양을 본떠 활모양으로 만들었다.

남호의 정면 한켠에 남호서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남호서원을 사람들은  “수목청화(水木清华)라고도 부른다. 서당은 모두 6개 부분으로 되여 있었다. 지도당(志道堂)은 선생이 강의하는 곳이고 문창각(文昌)은 학생들이 매일 례배하는 곳으로 벽 정면에 공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계몽각()은 독서하고 교육받는 곳이고 회문각()은 학자들이 책을 읽고 회의하는 곳이며 망호루(望湖)는 남호의 경치를 흠상하는 곳이다. 이외 전문 학생을 징벌하는 곳과 휴식터, 놀이터와 선생들의 숙소 등도 구전하게 있었다.

200년간 남호서원은 많은 명인과 학사를 배출했는 데 그중 청나라 내각 중서 왕강년(中汪康年)과 민국 제1임 총리 왕대섭(旺大燮)이 대표적이다. 

이 작은 마을에 이와 같은 교육 시설이 구전하게 있다는 것이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홍촌의 선인들은 교육과 독서의 중요성을 일찍 터득한 것 같다. 남호서당의 글귀에서도 보다 싶이 출세하여 벼슬하든 장사하든 책을 많이 읽고 아는 것이 많아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밖에 나가 장사를 하여 모은 돈으로 고향에 하나하나의 호화별장과 학교를 지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이 향수할 뿐만 아니라 조상과 가문을 빛내는 큰대사였다. 하였기에 홍촌에 일찍 6개의 서당이 있었고 후에는 상인들이 고향의 교육에 투자하여 1810년에 이와 같이 6천평의 땅에 남호서원을 새롭게 지을 수 있었다.

홍촌 관광을 마치고 귀로에 오르면서 나는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널리 알려진 중국 대부호와 거상들이 스크린마냥 눈앞에 떠오른다. 송씨 자매의 부친인 송요여(宋耀如)의 고향은 해남성  문창시(文昌市)의 자그마한 어촌 마을이다. 리가성의 고향도 광동성의 조안(潮安)이다. 휘주의 거상 왕정귀(汪定) 역시 편벽한 시골인 홍촌이 고향이 아닌가. 그들은 모두 가난하고 봉폐된 시골마을에서 자라 자신들이 처한  생활환경을 개변하고저 대도시로 떠나갔고 낯선 타향땅에서 잡일을 했으며 후에 장사를 배워 재부를 축적했다. 성공 후에는 고향 건설과 후대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하여 명성을 남겼다.

우리 고향도 개혁개방 40년의 훈풍을 타고 놀랄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근래에 많은 인구가 썰물처럼 외지로 흘러나가면서 심한  몸살을 앓기도 했다.

다행히 요즘 우리 주변에서도 거상은 아닐지라도 지난날 한국으로, 대도시로 돈벌러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투자한는 붐이 잔잔히 일고 있다. 덕분에 침체기에 처했던 고향이 서서히 활기를 되찾아가는 모습이다.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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