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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철의 수필-은잔
2020년07월16일 11:45   조회수:214   출처:청도조선족작가협회
수필

은잔

이홍철


   

은잔

 

와인잔처럼 목이 가늘고 배가 조금 불룩한 은빛 술잔이 있었다.

자전거, 재봉침, 라디오, 록음기를 가장 큰 주된 기물로 생각할 때 우리집에는 그런 것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은잔이 있었다.

삼촌, 그러니 아버지의 동생집에 갔다가 한쌍으로 있는 은잔을 보고 우격다짐으로 하나 빼앗아 온 아버지의 1호 보물이였다.

나는 그 때까지도 그 술잔이 아버지 스스로의 위상을 높이는 데 사용되는 가장 걸맞는 은총의 상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매일 저녁이면, 혹은 빛다른 채소가 올라오는 아침이면 은잔만은 아버지 스스로 챙기신다. 

-안주가 좋은데 한잔 해야지…

그러면서 술잔은 아버지가 챙기시고 술병은 나한테 넘긴다. 한잔 부어보아라는 뜻이다. 은연한 은빛이 곱게 서리인 술잔에 습관처럼 허리 굽히고 혹시 술이 귀한 세월에 넘쳐라도 날가 저어되여 조금 부으면 아버지는 한마디 무겁게 하신다.

-아새끼들(어린 아이들) 얼굴이 고르지 못하고 울퉁불퉁한 건 그럭저럭 봐줄 수 있지만 술잔이 차지 않는 건 봐줄 수 없다고 한다. 꼴똑 붓어라.

조금은 고색이 어린 은술잔에 입술을 대는 아버지는 그렇듯 행복해 보이셨다. 한모금 쪽- 소리나게 마시고는 습관처럼 입술이 아닌 술잔을 손으로 쓱- 닦으신다. 그러고는 한참을 술잔을 살피신다.

은잔은 높이가 대략 14센치 가량 되고 직경은 8센치쯤 되였으며 몸통에는 룡도 아니고 꽃도 아닌 문양이 조각으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보기에는 용량이 큰 것 같지만 기껏 7푼잔이다.

아버는 외삼촌들이 와도 종래로 허투로 술잔을 내주지 않으신다

-매부(매형),  은술잔 한번 써보면 안되우?

외삼촌들의 극진한 성화도 아버지의 한마디면 끝이다.

-은잔이던 유리잔이던 술이 담기면 마시는 것은 술이지 잔이 아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남들(?)한테 술잔을  빌려주지 않은 리유를 아주 깔끔하고 정당하고 말씀하셨다.

하긴 맞는 말씀이였다. 금잔이던 은잔이던 옥잔이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릇속의 내용물이지 그릇이 아니라는 아주 철리적인 말씀으로 들리였다.

근데 번마다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은 왜 모두다 그렇게 철리적이고 내가 쉽게 리해가 되는지 모르겠다.

처남이 와도, 동생이 와도, 아무리 친한 친구가 와도 빌려주지 않던 술잔을 아버지는 내 기억으로 딱 두번 남을 빌려 주셨다. 그것도 식사를 하는 온 저녁이 아니고 그저 한번을 빌려준 것이다. 받는 사람은 알고 받으면 무상의 영광이지만 모르고 받으니 그저 어느 촌부의 납술잔으로 생각했겠지만 그것이 납술잔이 아닌 어느 촌부의 최고의 은총인 은술잔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여러번 가져보았다.

처음으로 그 술잔을 받으신 분은 내가 중학교를 중퇴하고 그래도 문학이라고 한답시고 매일 꺼꾸로 엎뎌서 락서를 즐길 무렵 향중심소학교에 작문교원으로 새로 부임한 S선생님이셨다.

초중도 졸업하지 못한 자식이 평생을 자신의 뒤를 따라 농사군으로 살아야 한다는 기막힌 생각으로 늘 기분이 우울하시던 아버지가 내가 S시인을 선생님으로 모셨다니 그렇게도 황공해 하셨다.

-네가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다니? 그분은 우리 향에서 누구나 아는 작가 아니냐? 라디오에도 자꾸 나오고 책에도 자주 나더구나…

그래서 벼르고 벼르던 며칠후 선생님이 우리집으로 오시자 아버지는 자신의 1호 보물을 꺼내 드셨다.

꺼칠한 손바닥으로 술잔 둘레를 한번 쓱 닦으시더니 “S선생, 한잔 받소.” 하고 대범하게 말씀하셨다.

물론 선생님은 그 잔이 아버지에게서 그렇듯 특별한 잔일줄은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대로 한잔 받아 건배했다. 물론 아버지는 술잔을 도로 찾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는 이상하게 아버지의 그 술잔이 영물같은 신비한 존재로까지 느껴졌다.

-아, 저 술잔은 아무나 주는 것이 아니구…

그렇게 영광의 첫 술잔을 S선생님이 받으시고 평생을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을 것 같던 그 술잔이 내가 가장 존경하는 조선족 작가 K선생한테까지 돌아가게 될줄이야. 물론 K선생은 그 술잔을 받은 기억도 떠오르지 않을 것이지만 아버지의 마지막이자 두번째인 술잔을 K 선생이 받으셨다.

독신으로 세방살이를 하는 k선생이 그 해 설에 어쩌다 혼자 썰렁한 세집에 남게 되였다. 고향으로 설쇠러 가는 내가 느닷없이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책까지 팔아 술 사주고 없는 밑천에 명태껍질까지 짓이겨 술안주로 챙겨주던 k선생이, 어쩌면 친형처럼 대해주던 k선생이 홀로 설을 쇤다는 것이 너무나 죄스럽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k선생을 설복하여 고향행을 하게 되였다.

저녁식사시간에 아버지는 정중하게 그 은술잔을 꺼내들었다. k선생 보란 듯이 옷섶으로 은잔을 한번 닦더니 60촉짜리 전등빛에 비춰 잠간 흔상하는 것 같더니 거기에 술을 가득 부었다.

- k선생 한잔 받소…

받는 k선생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받았지만 보는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14년 만에 온 동생한테도 건네지 않던 은잔, 세상에 둘도 없이 귀엽다고 하던 처남한테도 넘기지 않던 은잔을 아버지는 처음 보는 k선생한테 넘긴 것이다. 그리고 한잔을 권하고 인차 되돌려 받기 쉽상이던 그 은잔을 아버지는 k선생이 두잔을 마실 때까지도 돌려받지 않았다…

-저 k생, 이렇게 오니 참 반갑구만. 우리애가 공부는 많이 못해도 글쓰기는 좋아해서 어려서부터 작문경색이랑 하면 번마다 상을 받았다오. 그러니 선생이 얘를 많이 도와주오.

유명한 작가분이라 아버지는 은잔으로 코밑치성을 한셈이였다. 자식의 앞날을 위해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술잔을 대가로 내놓은 것이다.

아버지의 은잔때문이였을가. 지금까지 k선생과의 소중한 인연은 거의 20년째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줄기차게 이어갈 것이다.

k선생까지 은잔 접대 후 그 누구의 손에도 은잔은 다시 건네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2006년에 아버지가 갑작스레 별세하면서 나는 고향집을 찾았고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그 은잔을 발견하게 되였다. 아버지의 손때와 싸한 술냄새가 배인 은잔을 조용히 손에 들고 있노라니 어쩐지 그 술잔에 술을 부어 마시고 싶다 는 충동이 간절히 일어났다. 생전 아버지한테서 받지 못했던 그 술잔을, 어쩌면 세번째로 술잔을 받을 사람이 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픔이 그들먹하게 가슴에 들어차는 순간이였다.

-너 혹시 그 술잔을 욕심내는 거 아니야?

문득 삼촌이 내 손에서 술잔을 앗아내며 묻는다.

-네, 집에 가져다 기념으로 남기고싶어요.

-안돼! 그건 아버지가 가장 아끼던 건데 아버지가 가지고 가게 놔두자.

삼촌의 만류로 은잔은 결국 불속에 들어갔다.

그 후 나는 삼촌으로부터 한가지 비밀을 알게 되였다.

-사실 그 잔은 은잔이 아니야. 납잔이야…

아버지는 알고 있었을가? 그처럼 소중히 여긴 술잔이 은잔이 아닌 납잔이였다는 것을?

그러나 은잔이던 납잔이던 아버지는 자신한테서 가장 소중한 것을 가장 소중한 아들을 위해 가장 귀한 분들한테 드렸었다. 그것이 그분들한테도 무한한 영광이 되였으면 납잔은 영원한 은잔로 빛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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