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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의 수필-한쌍의 베개모에 깃든 할머니의 숨결
2020년07월13일 14:39   조회수:421   출처:청도조선족작가협회
수필

한쌍의  베개모에 깃든 

할머니의 숨결

박영희


한쌍의  베개모에 깃든 

                       할머니의 숨결

 

나에게는 30여년을 함께 한 한쌍의 예쁜 베개모가 있다. 시집 올 때 할머니가 혼수용으로 베개 한쌍을 손수 만들어주고 또 덤으로 쓰라고  한쌍 주신 것이다 .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신 지도 어연 20여년, 그 동안 결혼하여 세방살이 수차에 이사짐을 이리 끌고 저리 옮겨 다니고 또 한국을 걸쳐 일본까지 건너가 8년이란 외국생활을 걸쳤고 귀국 후에는  광동으로 부터  산동으로 이사짐을 대 이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손길이 슴배여 있는 이 한쌍의  베개모는  시종일관 떠나지 않고 정히 싸인 채로 고스란히 나의 보배 궤속에 누워 있다.

나는 매년 집 청소나 옷정리 할 때면 몇번이고 꺼내서는 그 섬세한 할머니의 바느질 솜씨와 알록달록 아릿다운 비단과 눈처럼 흰 오광목을 보기 좋게 조화시켜 만든 베갯모를 한참씩 들여다 보면서 손으로 보듬어 본다. 마치 할머니의 숨결을 느끼듯이...

나는 태여나서 부터 할머니의 손끝에서 자랐다. 태여나서 수술대에서 받아서 할머니에게 넘긴 그 순간 부터였다. 그 때 어머니는 제왕절개 분만으로 나를 낳았고 대출혈로 생명이 위험하였으며 그 후에는 너무나 몸이 허약하여 집을 떠나 료양소에 가있지 않으면 안되였다.

할머니의 나에 대한 사랑은 특별하였다. 나의 어머니는 18세에 시집왔었는 데 아버지는 그 때 중국의과대학에서 공부 중인 학생이였다. 얼마 후 조선전쟁이 폭팔하자 재학 중인 아버지는 당시의 열혈 청년들과 함께 선두적으로 항미원조에 나갔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참군하게 되였다.

그 후 아버지는 조선전쟁터에서, 어머니는 후방 병원에서 옹근 전쟁의 년대를 경과하게 되였다. 결혼 9년 후 어머니가 륙군부대에서 퇴대해 지방으로 오자 바로 내가 태여나게 되였다. 할머니에겐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하기에 나의 출생으로 인한 할머니의 기쁜 심정은 더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하여 온 정성을 나한테 바치시였다.

그러나 갓난아기를 먹일 젖이 없었다. 지금은 우유를 먹여 키우는 것이 보통 일이 지만 50년대에는 분유가 없었기에 힘든 일이였다. 젖 없이 애를 키운 경험이 없는 할머니는 앙앙 배고파 우는 갓난아기를 안고 어쩔 줄 몰라했고 그 긴긴 겨울밤에 몇번이나 애기를 안고 함께 울었다고 한다. 할머니 같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아온 분도 속수무책이였다.

그 후 할머니는 수소문 끝에 친히 염소젖을 받아와서는 쌀가루와 함께 섞어 끓여 먹였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할 것없이 할머니는 매일 이른 새벽에 염소젖을 받으려 집을 나섰다. 그 어떤 여름의 찌는 듯한 무더위와  비바람, 겨울의 무릅까지 빠지는 눈사태와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한날 한시각도 드팀 없이 먼 농촌 길을 다녀왔다. 이렇게 할머니는 3년을 견지했다.

그 때는 나라가 막심한 경제난으로 사람들이 꿂주림에 허덕이고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고 무엇을 사려 해도 표가 있어야 했다. 아기에게 염소젖을 먹이려면 설탕이 수요되였다. 설탕은 그 때 아주 귀했는 데 마을의 가도(街道)에서 장악하고 있었는 데 그것도  몇근 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이 설탕을 위해 얼마나 애를 태우고 밤잠을 설쳤는지 모른다. 

할머니를 회억하면 지금도 나를 가장 눈물나게 하는 것은 문화대혁명때의 일들이다. 할머니가 아니였다면 그 곡절많은 고난의 동년을 나는 어떻게 보내였을지 상상하기 조차 힘들다.

그 때 나는 소학교 3학년이였다.  고독하고 힘들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면서  항상 집 나가신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 무섭고 추운 동란의 년대를 무사히 보낼 수 있은 것은 할머니의 끝없는 사랑, 따스함과 포근함이 항상 나를 동반해 주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나의 보호신이였고 의탁이였을 뿐만 아니라 또 나의 가장 친근한 벗이기도 하였다.  나는 항상 할머니의 팔을 베고 누워 옛이야기 듣기를 즐겼다.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들군 했다.

 할머니는 언제 어느 때 보나 걍핏한 체격에 강단있고 날파람 있는 분이였다. 또 부지런하고 깨끗하면서도 지혜와 재간이 뛰여난 분이시였다. 고령이 되였어도 낮잠을 자는 것을 보지 못했고 항상 일을 찾아 두손이 쉼 없었다.

할머니의 로년기의 중요한 취미생활 중 하나가 바로 베개머리를 만드시는 것이였다. 할머니는 틈만 있으면 새색시 시집갈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예쁜 베개모를 만드셨는 데 만들어서는 친척과 가까운 이웃들에게  선사하였다.

겨울철 추운 새벽이면 따뜻한 이불 속에서 항상 불은 켜고 바느질하는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때론 철없는 내가 불빛이 잠을 깨여 시계를 쳐다보면 바늘이 새벽 2,3시를 가르켰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든 따뜻한 구들에 차려 놓은 김이 몰몰 피여 오르는 아침 밥을 볼 수 있었다.

학교에서 하학하고 돌아오면 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고 또 닦아 항상 새로 기름칠한 듯 반들반들 윤기나는 노란 장판과 원목가구들, 그리고 알뜰한 저녁밥상을 차려 놓고 전등불을 환히 밝히고 바느질하면서 기다리시는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따뜻하고 깨끗하며 온화한 할머니의 그 옆모습이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깊은 락인이 되여 시도때도 없이 머리 속에 그림처럼 떠오른다.

할머니의 뛰여난 바느질 솜씨와 재치 있는 베개모의 색상 조합은  친척들과 동네 방네에 점평이 나있었다. 그 때는 천도 배급제로 하고 물질 생활이 더없이 단조롭던 때라 할머니의  베개머리는 우리마을 집집의 사치품으로 사용되여 항상 이불 단아에 곱게 얹혀 있었다.

일상용 베개를 만들 때 흔히 마을 사람들은  짙은 색으로 자루를 만들고 량쪽에  할머니의 베개모를 붙이였다. 다음 자루 속에는 메밀 혹은 벼겨를 넣어 깁고는 베개우에 흰 오광목으로 잇을 해서  씌웠다.  베개모는 베개의 형태를 잡아주는 동시에 베개를 곱게 장식하는 역할을 하였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을 사람들은 항상 할머니의  베개모에 엄지손을 들었고 솜씨 좋은 새 색시들은 찾아와서 만드는 방법까지  배워갔다.

할머니가 베개모 바느질을 할 때면 신변에는 항상 이글거리는 불화로, 인두와  철다리미 그리고 다리미판이 놓여있었다. 철 다리미는 형태는 지금의 전기 다리미와 비슷하지만 2_3배 정도 크고 투박하다. 전기 다리미의 중간층 물을 넣는 곳이 철 다리미는 비여 있기에 불화로의 이글거리는 숱불덩어리를 여기에 넣어서 달구어 쓰셨다.

할머니 옆에는 또 깜직한 바느질 바구니와 보배 보따리가 놓여 있다. 보따리를 헤치면 그 세월에도 신기하게 아롱다롱 그야말로 가지각양의 아릿다운 재질의 천으로 가관이였다. 자그마한 비단쪼각도 할머니의 손에서는 신기하게 재활용되였다.

어린 시절 무료하기 짝이 없는 한겨울이면 나는 할머니의 옆에 꼭 붙어서는 할머니의 보배 보따리를 풀어 헤치기를 즐겼고 때론 재치있게  오르내리는 할머니의 날렵한 손길을 넋놓고 오래도록 지켜 보군 하였다. 정방형의 흰 오광목 쪼각 4개를 다리미로 종이 접듯이 반듯이 접고는 중간에 각기 다른 네가지 색상 비단을 붙이고  접은 후에는 바느질로 십자로 연결하고 연결 부위에 또 비단을 대고는 철 다리미로 반듯이 다린다. 희디흰  오광목을 번질 때는 아릿다운 가로세로 십자 모양의 꽃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때면 할머니는 화로 불에 깁숙히 박힌 달군 인두를 적당히 식혀서는 흰천의 솔기를 꺽어 꼭꼭 눌러가면서 알록달록 꽃을 활짝 피워간다. 다음은 여러가지 색실과 반짝이를 조화시켜 꽃실 매듭을 만들어서는 꽃속을 만든다. 어느 정도 만들어 많이 쌓여가면 마지막으로 재봉틀에 앉으셔 섬세한 솜씨로 마무리한다.

할머니는 베개모 둘레와 베개 머리의 연결을 매우 섬세하게 하였다. 베개잇 밖의  보이는 부분을 전부 결혼용 칠색단 모분단 이불의 남색, 녹색, 붉은색, 분홍색과 어울리는 화려한 비단을 대서 한층 고급스럽게 보이게 하였다. 지금의 전통 결혼 베개와 마찬가지로 신랑의 베개는 남색, 초록색을 위주로 하고 신부의 베개는 붉은 색과 분홍색을 썼는 데 문양과 재질에 따라 오늘날의 것과 좀 다르지만 별 큰차이가 없다.  다르다면 지금보다 베개모가 크고  베개가 높은 것이 다르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지금은 물질생활이 풍부하고 침구의 종류도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많고 빛갈도 눈이 부시게 화려하지만 나에게는 할머니의 베갯모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수한 의미가 있다.

이 한쌍의 베개모를 볼 때마다 나는 할머니의 따스한 숨결과 손길을 느끼게 되며 가족과 나에 대한 할머니의 무한한 애정이 되새겨진다. 아마 할머니의 형상에는 그 시대를 함께 한 무수한 우리민족 녀성들의 슬기와 재능 그리고 힘겹게 걸어온 삶의 흔적이 함께 어려있는 것이 아닐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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