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지역변경]
업체입주
위챗으로 스캔하기
업체입주
등록
위챗으로 스캔하기
등록하기
포스트  >  좋은 글  >  김미령의 수필-머리 없는 녀자
김미령의 수필-머리 없는 녀자
2020년07월06일 16:03   조회수:3299   출처:청도조선족작가협회
수필

머리 없는 녀자

김미령


머리 없는 녀자

 

내가 머리 없는 녀자로 산지 4개월이 되였다. 지난해 11월22일에 머리를 삭발하고 불면증과 경추병 치료를 시작했다. 항암 치료와 스님이 되는 일 외에는 머리를 삭발할 리유가 없는 데 내가 머리를 삭발했으니 만나는 사람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당연하다.

머리 삭발까지 하고 치료할 정도면 심각하겠지 하고 나름대로 생각을 하겠지만 나는 불면증이 심각해 10여년 동안 아무리 피곤해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잠을 자는 사람들을 부러워했겠는가?

머리를 삭발한 나의 또 다른 목적 중의 하나는 다시 새롭게 태여나고 싶었던 것이다. 45세, 인생의 중턱에 서서 지난날을 제대로 한번 돌아보고 새로운 래일을 다시 다져보는 힐링의 시간을 갖고 싶었던 리유도 있었다.

이젠 나를 키워준 양할머니, 양부모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내 곁에 가족이라고는 신랑을 빼놓고는 없다. 한국에 친형제들이 있기는 하지만 함께 자라지 못한 탓인지 별로 나눌 정도 없고 모두가 힘들게 살다 보니 자주 련락하고 만나기가 어려웠다.

아픔이 많아서 이런 아픔을 털고 싶고 지금까지 잘 살아온 자신이 스스로도 기특해서 한번쯤 누구나 감히 하지 못하는 삭발을 한 것이다.

지금은 머리가 좀 자라서 당당히 사람들 앞에 나서지만 금방 삭발하고 나서 지금까지의 그 과정은 사실 참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또 다른 삶의 도리를 많이 터득하게 되고 더 힘차게 씩씩하게 살아갈 인생의 용기를 많이 얻었다. 인생은 이겨내는 것이고 이겨낸 것 만큼 강해지고 강한 만큼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얼마전 수술한 소꿉시절 친구를 보러 심양을 다녀왔다. 내가 청도에서 22년을 사는 동안 별로 련락이 없었던 친구지만 연길에서 하는 나의 결혼식에 친정 대표로 일부러 기차를 타고 참석해준 참 고마운 친구였다. 평생 은혜로운 친구가 아프다니 내 마음도 따라 아팠다. 나를 보면서 눈물을 보인 그 친구와 친구의 어머니는 나의 그 멀고 힘든 발검음에 감동을 안할 수가 없다고 나를 꼭 끌어안았다.

병문안을 갔던 김에 이틑날 아침 추위를 맞으며 서탑가를 걸었다. 목적 없이 걷다가 1974년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커피숍이 보이기에 들려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셨다. 내가 1974년생이니 이 글자가 적힌 커피숍이 눈에 띄인 것이다. 알고 보니 이 커피숍 주인이 1974년생이였다. 그 병문안 갔던 소꿉친구의 친구란다. 나는 그 녀자를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참 멋지게 사는 녀자로 느껴졌다. 커피숍 간판에 자기 출생년을 적는 커피숍 사장은 처음으로 보았다.

커피숍을 나서 나는 조선말도서관에 들렸다. 1997년 심양을 떠나기 전에 많이 들렸던 이 서점이 아직도 있으니 나도 이 서점 주인의 끈질김에 더 감동이 깊었다.

책을 사면서 책 파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중 나는 이 도서관이 거의 70년을 넘었다는 것을 알게 되였고 그 집 주인은 나의 고중 동창의 부인이였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그 곳에 내가 쓴 글이 실려있는 전국애심포럼 수상작품집이 보기 좋게 꽂혀 있어서 나는 기분이 좋아 한권을 사서 심양에 그 소꿉친구한테 선물을 했다. 

이쯤에 웬지 “돌계단과 돌부처” 이야기가 생각난다. 돌계단이나 부처나 똑같이 돌로 되여 있는 데 사람들은 부처상을 보면 절을 하고 계단은 짓밟고 다니지 않는가? 그래서 어느날 돌계단이 부처상에게 불평을 했다.

당신이나 나나 똑 같은 돌로 만들었는 데 왜 사람들은 나를 밟고 다니면서 당신에게는 허리를 굽혀 절하는 거야?”

그러자 돌부처상이 이렇게 답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수없이 정을 맞았는 줄 알아?”

수도없이 정과 망치질이 있었기에 오늘의 부처가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겉으로 화려해보이고 성공 일색의 영웅처럼 보이거나 행복해보이는 사람들도 한 꺼풀 벗기면 다 상처투성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고난을 겪는 만큼 위대해지는 법이다.

또 웬지 바다의 진주 그리고 달팽이와 새둥지가 생각난다. 조개는 이물질이 들어오니 그걸 막고 그걸 이겨낼려고 단단해질려고 하니 진주가 만들어지고 달팽이도 가슴으로 길을 걸어야 하니 가슴에 근육이 생기고 새둥지도 바람이 가장 많이 부는 날에 만들어지니 그 둥지도 나중에는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도 않는단다.

올해가 청도에서 기자생활을 한지 20년째 접어드는 해이다. 아무 밑천도 없이 가진 것도 없이 20년이라는 기자 세월을 어떻게 보내오고 버텨오고 이겨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을 겪고 경험해왔다. 고생한 만큼 보수도 없고 힘들고 가난한 직업, 기분 나쁠 때는 그 숭엄한 존엄 때문에 함부러 화도 내지 못하고 남이 부러워한다는 멋진 직업 때문에 약한 모습도 보일 수가 없고 부르고 필요한 곳이라면 낮이건 밤이건 달려가야 하고 주말이건 평일이건 어디든지 모습을 드러내야 하고 술도 남 못지 않게 마셔야 하고 아는 것도 많아야 하고 자신을 낮출 줄 알고 자신을 지킬 줄도 알고 자신을 드러낼 줄도 알고 감출 줄도 알고 기쁨과 슬픔을 다듬을 줄도 알고 마음을 다스릴 줄도 알고 대인관계도 웬만해야 하고 남이 험담하거나 씹거나 또는 오해하거나 상처를 줄 때도 말없이 견뎌내야만 했다.

세월이 약이라고 나도 그런 억울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면 그렇게 말없이 참고 참아왔다. 피곤하고 아파도 글은 제때에 써야 하고 깨알 같은 문자들과 허리 아프게 머리 아프게 씨름해야 했다. 온몸은 성한 데가 없고 달리고 마시고 쓰고 밤을 패다보면 노가다보다 더 힘들 때도 있다.

몸과 머리, 마음이 모두 힘들어야 살수 있는 기자, 이 직업을 본의 아니게 선택한 게 벌써 20년이나 걸어왔다. 다시 가라 하면 가지 못할 그 길, 아파도 보람 느껴도 더는 가지 못하는 그 길, 얼마나 많은 눈물로 땀으로 쌓아온 그 길인데. 웃을 날도 많았지만 더 많은 것은 외롭고 힘들고 슬픈 날인 거 같았다.

하지만 고아로 홀로 살아오면서 청도땅에서 나를 강하게 만들 수 있고 살아올 수 있게 한 건 역시 기자라는 직업이다. 마음이 의지할 곳 없어 헤메고 슬퍼서 슬퍼서 이슬처럼 사라지고 싶을 때, 힘들고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을 때, 실의에 빠져 포기하고 싶을 때 역시 기자라는 직업은 가족처럼 은인처럼 태양처럼 나에게 희망을 비추고 사랑을 비추고 미래를 비추어주었다.

보기에는 쉬워보이고 멋져 보이는 이 기자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직업이고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난 행운스럽게 가졌다. 돈 버는 직업은 아니고 남 모르는 힘겨움이 많지만 그래도 남을 위해 글을 쓸 수 있고 누구가를 위해 희망을 만들어주는 이런 직업은 내가 봐도 참 멋지다.

더불어 나와 함께 이 길을 가고 있는 우리 신문사 사장과 동료들이 너무 고맙고 대견스럽게 느껴진다. 내 곁에 이런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니 나는 이 사람들 위해 늘 기도해주고 축복을 드리고 싶다.

무릎 꿇고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세상을 향해 낮은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늘 겸손한 태도로 살고 싶어서, 도도히 모습을 드러내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아름답기도 하면서 바람 부는 이 세상을 씩씩하고 용감하게 살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꽃잎 하나의 손짓 같았다. ]

바람 부는 언덕에 서서, 비 내리는 바다가에 앉아서, 어두운 방안에서 조용히 걷는 길에서 난 수없이 수없이 많이 울었고 힘들어했다. 하지만 또 눈물을 쓰윽 닦고 다시 자신과 웃으면서 일어나는 날들이 참도 많았다.

인생은 늘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그러고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인생을 잘 다스린다고 하지만, 그리고 인생은 늘 자신을 수련하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매일 도를 닦는 스님처럼 매일 생을 터득하는 철학가처럼 생각하며 싸우며 밤새우며 그런 힘겨운 날들을 용케도 잘 버텨왔다. 남들에게는 위로와 응원을 잘 해주면서 어쩐지 나 자신에게는 그러지 못한 거 같기도 해서 자신에게 오늘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고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고 대견하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자존심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살아야 하는 날들이 많아서 난 억울했다. 외로워서 힘이 겨워서 난 서러워한 날들이 많았다. 슬퍼서 아이처럼 울 때도 많았다. 하지만 대신 존경받고 인정받고 힘이 되는 날들 웃으며 지낸 날들이 더 많았으니 난 그 것으로도 족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가야 할 날들이 더 많은 나, 힘들었던 것보다 행복했던 날들이 더 많았던 날들 나에게는 가장 빛나고 소중한 날들이였다. 그런 하루하루의 날들이 모여 오늘의 내가 있은 것이다.

세월이라는 강물 우로 나는 많은 것을 흘려보냈지만 또한 많은 것을 품고 간직해왔다.

가끔은 아주 많은 날에는 나는 혼자 바다가로 달려가 실컷 울음을 토해내고 자연스레 범람시켜 해살과 바람에 나의 눈물을 말려 하늘로 보냈다. 그래야만 훗날 눈물과 슬픔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내 안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였으니 말이다.

20년을 어떻게 또박또박 걸어왔는지 지금 생각하면 놀랄 정도로 기적인 거 같았다. 나에게는 보이는 아픔, 보이지 않는 아픔이 참 많았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 아무도 가지 못하는 길을 가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길은 고통과 쓴 맛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가파르고 힘든 려정의 길을 걷다 보면 나중에는 꽃이 가득 피여난 “꽃길”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고 있다.

바쁜 기자 생활하다 보니 결혼도 시기를 놓치고 늦게야 찾아온 사랑과 인연, 하지만 살다 보면 그런 것도 있는 거지, 통졸임보다 깡통이 더 먼저 발명됐다는 것, 늦게 찾아오는 것들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들, 사랑도 행복도 그런 거다. 결혼은 짙어가는 가을의 잎새처럼 깊어지고 향기가 나는 것처럼 기자 인생 20년 속에 담겨진 그 깊음과 향기는 나로 하여 더 철들게 했고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구해준 셈이다.

기자라는 직업은 나에게 참 고마운 직업이다. 나를 이쁘게 세련되게 익어가게 해주고 나에게 삶의 의미를 찾게 해주고 태여난 그 가치를 알려주고 인생의 도리를 가르쳐주고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게 해준 참 고마운 직업이다.

칼에 찍히고 찍혀서 이쁜 조각이 된 작품, 땡볕에 말리고 말려져서 피가 다 마르고 살이 다 찢어져 사람들에게 맛있는 술안주가 된 짝태처럼 난 아프고 힘들게 강하게 살면서 지금의 내가 되였고 김기자가 되였다. 거의 20년이 다 되여가는 세월 나는 기자라는 직업으로 그렇게 넘어지고 일어나고 일어나고 넘어지면서도 오뚜기처럼 또 일어날 수 있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였다. 수많은 세월에 태우고 또 태워져 빨간 감으로 된 것처럼, 거세찬 파도에 훈련받아 바다에서 흔들리지 않는 바위돌처럼, 돌우에 피여나는 꽃처럼, 몇년을 살고난 뒤에는 온몸의 털을  자기 부리로 다 쫓고 발톱을 다 뽑아야 30년을 더 살 수 있는 솔개처럼 나는 죽을 만큼 힘들었을 때도 그런 아픔을 딛고 당차게 일어선 날들이 수없이 많았다. 

이처럼  수많은 락엽이 떨어진 그 곳, 꽃이 피고 진 그 곳 그 곳이 또한 바로 계절이 바뀌여 다시 꽃잎이 피는 것처럼, 다시 새싹이 돋는 것처럼 그렇게 희망이 찬 자리이다.

큰 파도가 지나간 곳에는 큰 어장이 생긴다”, “동틀 무렵이 가장 어둡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았다”, “고생을 다 하고 나면 락이 온다”, “고진감래”

나는  이 말들을 좋아한다. 나에게 큰 힘이 되여준 글구들이다.

우린 때때로 “많은 것”에 절망하면서도 “어떤 것”에 희망을 걸면서 살아간다. 희망은 분명 삶을 지탱한다. 감히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게 하는 힘이야말로 희망의 원형질이다.

나는 아마 이런 희망을 찾고싶어서 머리를 삭발한지도 모른다.

이제는 머리도 새롭게 자랐고 날씨도 따뜻해졌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더 열심히 살아보라고 봄바람이 나의 등을 힘있게 두드린다.


김미령.jpg


포스트 아이디
청도조선족작가협회
소개
청도작가협회
추천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