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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동호의 그 옛날 그이야기-독수공방
2021년04월28일 11:03   조회수:710   출처:청도조선족작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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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독수공방

림동호

  

독수공방

나는 총각 때부터 혼자 집에 있기를 좋아했다. 그렇다고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허송세월 보내듯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필요한 약속은 어겨 본 적 없었다.

원래부터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항상 나만의 공간을 좋아했던 것이다. 남들은 비 오 거나 눈이 올 때 생산대에서 일하지 않는 날이면 현성에 가거나 카드놀이 아니면 화투놀이로 술 내기를 즐겼지만, 나는 문을 잠그고 독서를 하거나 글쓰기를 좋아했다. 조용한 분위기여야 좋은 구상과 허구가 떠오르군 했다. 술상이 차려졌다고 통보가 있어야 부랴부랴 찾아가는 나였다.

나는 ‘쓸데없는 손님’들이 집에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손님이란 별일도 없으면서 와서 오래간 잡담을 하는 사람들이다. 책 읽는 시간 아니면 글 쓸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이었다. “손님은 뒷모습이 아름답다”는 속담은 나 보고 한 말인 듯도 했다. 나도 남의 집에 가서 오래 있는 법이 절대로 없었다.

겨울이 되면 다른 친구들은 도박 놀다 잡혀 벌금 당하거나 구류되는 일들이 많았지만 나에겐 그런 일이 없었다. 짬만 있으면 책을 읽거나 글을 썼기에 놀음 장소에 갈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누라는 내가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이 놀음을 놀지 않는 것이라 했다.

한국에서 10년간 체류하면서 휴일을 이용해 나는 많은 글을 써서 투고했다. 원고료만으로도 나의 생활비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봉급은 고스란히 마누라의 계좌로 들어갔다.

봉급 날이면 좋아 죽는 건 마누라였다. 십 년간 휴일은 있었지만 윌급이니 봉급과는 상관없었다. 시골에 가 있으니 친구들과의 약속도 없었다. 예식장이나 장례식장은 서울에 있는 마누라가 다녔다. 시골 농장에서 먹고 재워 주었기에 돈 쓸 일이란 5일에 한 곽씩 피우는 2천 원의 담뱃값이 전부였다. 한곳에서 오래 하니 봉급은 해마다 올랐다.

돈은 그래서 좀 모은 것 같았다. 모두들 돈 많이 번다고 부러워했었다.

귀국 뒤 나는 진짜 독수공방 생활을 체험하게 되었다 . 마누라는 한국에 남아서 계속 돈벌이를 했고 두 딸애들은 벌써 시집을 간 뒤여서 90평 되는 큰 집에서 혼자 지내게 되었다.

남들은 독수공방을 적적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관심 조로 물었는데 나에게는 나쁜 데가 없었다. 아침에 집 안을 깨끗이 청소를 해놓으면 하루 종일 깨끗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어 좋았다.

지난 음력 설에도 한국에 있던 마누라와 상해에 있는 딸들이 설 쉬러 청도에 왔는데 외손주 놈이 얼마나 설쳐 대는지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손주가 10분 동안만 이뻤다. 저놈이 언제 가지? 란 생각도 해 보았지만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아무리 부녀 사이지만 말 한번 잘못 했다간 삐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누라와 딸 들은 꼭 한 달간 있었는데 나는 무슨 정신으로 한 달을 보냈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설 쉬고 마누라와 애들이 모두 되돌아 갔다.

휴~ 끝내 다 갔구나!

집은 텅 빈 감이 있었지만 이제야 원 상태로 회복 되었다 싶었다. 내가 바라던 독수공방, 책도 읽을 수 있고 짬 봐서 글도 쓸 수 있어 좋았다. 혼자서 어떻게 사느냐? 밥은 어떻게 해 먹고? 라며 많은 친구들이 나의 독신 생활을 궁금해했다.

나는 혼자 산다고 때를 거르는 일은 절대 없다. 국은 기본, 요리도 꼭 챙겨서 나름대로 먹고 싶은 걸 해 먹고는 한 시간 정도 집 청소를 하고 조용한 집에서 독서를 하거나 글 쓰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혼자만의 천국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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